초췌한 모습의 딸을 보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출산 후 물조차 마시지 못하고 오로지 링거수액만을 맞고 있는 딸이었다. 순간 세월을 뛰어넘어 묵직한 죄책감이 청구되었다. 딸을 낳던 날은 엄동설한이 기승을 부리던 그해 1월의 한밤중이었다.
만삭의 아내를 부축하여 산부인과를 찾아 입원시켰다. 간호사는 잠시 후 아기를 출산하니 아빠도 곁에서 그 과정을 보면 좋을 듯 싶다고 했다. 하지만 왠지 그렇게 덜컥 겁이 났다. 밖에 나가 담배 한 대 태우고 오겠다며 병실을 빠져나왔다.
근처에 마침맞게 포장마차가 있었다. 거기서 국수 한 그릇에 소주 두 병을 비웠다. 초조함을 달래는 데는 술이 가장 합당했다. '사상 처음으로 맞이할 딸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녀석은 제 오빠를 닮아서 유순하게 잘 자라줄까? 딸을 낳으면 이제 나도 두 아이의 아빠가 될진대 앞으로 돈을 더 벌자면 어찌 해야 할까?'
갖가지 자문자답(自問自答)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셈을 치르고 병실에 들어섰다. 어느새 태어난 딸이 아내의 곁에서 쌕쌕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은 정녕 '아기 천사'였다. 아내는 기운이 남았던지 "나는 애를 낳느라 죽을 둥 살 둥 몰랐거늘 당신은 또 그새를 못 참아 술을 마시고 왔냐?"며 야단쳤다.
유구무언(有口無言)으로 그 위기를 넘겼다. 그렇게 이 세상에 나온 딸은 아들과 함께 '좌청룡우백호'의 역할에도 충실해 주었다. 그러한 부채(負債)까지 있던 터라 수척한 모습의 딸을 보는 필자의 마음은 못에 찔린 양 아플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내 딸아, 아기를 낳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수고했다!! 그리고 고맙다!!!' 잠시 후 사돈이 오시고 아들도 달려왔다. 면회 가능시간인 오후 7시가 되어 신생아실로 우르르 이동했다. 그 신생아실에서 처음 마주한 외손녀의 꼼지락거리는 모습이라니…….
'아! 너는 정녕 하늘이 주신 사상 최대의 선물이로다! 네 놈 덕분에 오늘부터 나는 '할아버지'로 신분까지 상승하였구나. 무럭무럭 잘 자라거라. 사랑한다. 내 손녀야!' 보면 볼수록 예쁘고 신기스럽기까지 한 외손녀를 보면서 가부진조(假父眞祖), 즉 '가짜 아빠에 진짜 할아버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위에서 피력한 것처럼 딸을 출산할 당시의 기억이 오버랩 된 때문이었다. 자신의 분신인 딸을 낳을 적에 산부인과를 탈출(?)한 경거망동은 분명 가짜 아빠에 다름 아니었다. 반면 사랑하는 딸이 외손녀를 보여주었을 때는 비로소 진짜 할아버지가 되는 느낌이었다.
1월 16일자 헤럴드경제에서는 '위기의 국민연금, 인구절벽에 수익률 악화까지… 개혁 더 늦출 수 없다'를 보도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국민의 든든한 노후 버팀목인 국민연금이 사상 유례 없는 인구절벽에다 운용수익률 악화까지 겹치면서 기금 조기 고갈 우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고 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말 기준으로 국민연금기금 운용수익률이 ?0.57%(연환산 기준 -0.39%)를 기록했다. 이처럼 수익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은 글로벌 금융 위기가 발생했던 2008년(-0.18%) 이후 10년 만에 처음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지난해 10월 말 기준 국민연금 기금은 637조360억 원으로 9월 말 653조6300억 원보다 16조5940억 원이나 줄어들었다. 이 기금을 육아정책에 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고개를 든 것은 비단 필자뿐이었을까?
아울러 가시화하고 있는 인구절벽도 국민연금의 지속가능성에 커다란 위기 요인이라는 분석을 냈다. 지난해 3분기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은 세계 최저 수준인 0.95명을 기록했다. 그야말로 '출산율 0명'의 시대다.
이런 관점에서 딸은 '애국자'까지 된 셈이다.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자꾸만 추락하는 이유는 차고도 넘친다. 2017년 1월 보건복지부 워킹맘 공무원 김선숙 사무관이 새벽출근과 야근에 주말근무 강행으로 인해 순직했다.
작년 11월엔 두 아들의 엄마이기도 했던 서울고등법원 소속 이승윤 판사가 과로사로 안방 화장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능력 넘치는 워킹맘이 마음 놓고 양육할 수 있는 기반의 조성부터 갖춰져야 '출산율 0명'의 대한민국 인구절벽 위기를 이겨낼 수 있음은 구태여 사족의 강조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