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돈이면 짜장면 내지 짬뽕을 먹을 수 있다는 단순계산이 앞서는 서민인 까닭이다. 반면 서울 사는 딸은 집에만 오면 그 커피숍을 단골로 간다. 그래서 하루는 아내가 "커피 값이 아깝지 않니?"라고 물었다. 그러자 딸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사람은 십인십색(十人十色)인지라 기호식품 역시 천차만별(千差萬別)일 수밖에 없다. 스타벅스 커피 대신 평소 소주를 즐기는 필자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렇다. 병당 4천 원인 소주를 식당에서 두 병만 마신다손 쳐도 금세 8천 원이 청구되니까.
1월 11일자 한국경제에서는 <화장실 인심 잘못 썼다가…스타벅스 '공유지의 비극'> 기사를 실었다. 내용인즉, 스타벅스가 화장실을 무료로 개방한 뒤 쓰레기가 넘쳐나는 등 '공유지의 비극'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월 10일(현지시간) 스타벅스가 지난해 5월 화장실을 개방한 뒤 불분명한 이유로 화장실 문을 잠가 놓거나 청소 중이란 이유로 출입을 막아놓는 사례가 크게 늘었다고 보도했다고 한다.
이에 한 스타벅스 직원은 "모든 사람이 화장실을 쓸 수 있게 한 결과 아무도 사용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기사를 보면서 예상된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생각에 쓴웃음이 나왔다.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은 주인이 따로 없는 공동 방목장에선 농부들이 경쟁적으로 더 많은 소를 끌고 나오는 것이 이득이므로 그 결과, 방목장은 곧 황폐화되고 만다는 걸 경고하는 개념이다.
'공유지의 비극'은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된 시점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나타난 것이 초지를 분할 소유하고 각자의 초지에 울타리를 치는 이른바 '인클로저 운동(enclosure movement)'이다.
공유지의 비극과 유사한 우화로 '구명선에서의 생존'이 있다. 열 명 분의 식량밖에 준비되어 있지 않은 구명선에 열 명이 타고 있는데 어떤 한 사람이 구원을 요청했다. 이때,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구명선 자체를 위협하는 무책임하고 비합리적인 행동이라는 걸 말하기 위한 예시(例示)다.
필자가 근무하는 직장 건물은 그동안 24시간 개방했다. 그러다가 서울의 아현동 통신구 화재 이후 화들짝 놀란 경영진에서 오후 8시30분부터 이튿날 05시까지 폐문을 지시했다. 덕분에 '공유지의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어 한시름 놓고 있는 즈음이다.
미국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공유지의 비극이 있다고? 그렇다. 사실이다! 이제부터 구체적 사례를 들어 설명하겠다. 24시간 개방하는 건물이다 보니 시도 때도 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했다.
그런데 대낮과 달리 밤(夜), 특히나 자정 무렵이라든가 새벽 즈음에 들어서는 이들의 대부분은 취객(醉客)이었다. 화장실 안에 들어가 용변을 보면서도 큰소리로 통화를 하는 건 기본옵션이었다.
금연표지가 선명함에도 아랑곳 않고 흡연하여 담배연기가 꾸역꾸역 올라오는 건 여자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구토를 하곤 뒤처리를 안 한 사람들도 부지기 수였다. 공짜라고 화장지를 어찌나 낭비했는지 양변기가 막혀 수리한 적도 비일비재했다.
그처럼 골머리를 앓게 하는 바람에 이제는 일정시간이나마 출입자를 통제할 수 있어 여간 다행(多幸)이 아닐 수 없다. '공유지의 비극'과 유사한 것으론 '깨진 유리창 법칙'을 들 수 있다.
평소에 자주 지나던 거리를 걸어가는데 어떤 상점의 쇼윈도에 누군가 돌을 던졌는지 유리창이 깨져 있었다. 그 다음날에도 그 깨진 유리창은 그대로 방치돼 있다. 그렇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그 빌딩 주인이나 관리인이 그 건물에 대해 별로 애착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자신마저 돌을 던져 그 유리창을 깨도, 어느 누구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가 든다는 이론이다.
이런 생각이 이심전심(以心傳心)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파된다면 그야말로 무법 상태에서 모든 유리창이 깨지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 것이다.
결론적으로 스타벅스가 지난해 5월 하워드 슐츠 당시 회장의 결정에 따라 음료 구입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방문객에게 화장실을 개방하기로 했다는 조치는 이제라도 재고(再考)되어야 마땅하다. 세상은 결코 내 생각만큼 따라주지 않는다.
홍경석 / 수필가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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