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지연 우송대 초빙교수 |
지금부터 두 개의 쌍둥이 영화를 소개할 것인데 <신비한 동물 사전>에는 다른 것을 혐오하다가 억압하고 차별하여 일어난 사회적 문제가, <괴물의 아이>에는 그런 갈등이 두려워 차별하지 않겠답시고 엄연히 다른 것을 자꾸만 굳이 똑같다고 가르쳐서 일어난 심리적 문제가 각각 담겨있다.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은 현대 글로벌 사회에서 새로이 요구되는 타자성에 대한 고민에 보다 집중해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신비한 동물 사전>에 나오는 동물들의 모습은 괴물에 가깝다. 원제도 animal 아니고 beast. 소수자 차별과 이종족 간 공존이라는 화두에 얽힌 제도적이고 정치적인 이슈를 다루다 보니 대통령, 마법부, 의회직원, 안보부국장이 등장하는 것일 테고.
호소다 마모루의 애니메이션 <괴물의 아이>에서는 인간이 이계에 적응해 성장하는 과정에서 원래부터 인간에게 내재된 어둠이 뒤틀려버린다. 실은 본인도 인간이면서 끊임없이 "인간 주제에 감히!"를 연발하다가 폭주하는 이치로 히코는 <신비한 동물 사전>에서 마녀 규탄 전단지를 뿌리고 다니며 자신이 마법사임을 부정하는 크레덴스와 닮았다.
악의 기원과 탄생을 진단하는 발상이 비슷하다. 어린 마법사들이 인간의 탄압을 피해 자신의 마법력을 스스로 가두고 숨기다가 마음 속에 옵스큐러스라는 일종의 괴물을 키우게 되고 그것이 결국 그 어린 마법사를 숙주삼아 먹어삼키고 만다는 설정이 그렇다. 따라서 <괴물의 아이>에 나오는 "어둠-고래"와 <신비한 동물 사전>의 "옵스큐러스"는 거의 같은 발생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괴물의 아이>에서처럼 인간계와 괴물계의 차이든, <신비한 동물 사전>에서처럼 인간계와 마법계의 차이든 - 두 영화 모두 어떤 낯섦과 차이에 의해 일어나는 타자에 대한 혐오감, 공포심에 대해 정직하게 교육하지 않거나, 적절히 제한하고 방어해주지 못할 때, 그것들이 누군가의 내면에서 브레이크 없는 자기혐오 내지 타자혐오, 열등감, 복수심으로 악화되어 세계를 파멸로 이끌 수 있음을 경고한다.
그런데 특기할 만한 분기점이 있다. 사실 <괴물의 아이>의 이치로 히코는 <신비한 동물 사전>의 크레덴스의 성장과정과 다르게 핍박받거나 학대당한 적이 없다. 인간으로서의 정직한 자기인식을 방해하는 괴물계 양부모의 선한 의도, 하얀 거짓말, 가식적이고 일방적인 사랑이 오히려 화근이었다. "왜 저는 아버지처럼 송곳니가 나지 않는 거죠?" 묻는 인간 아이에게 너는 우리와 같은 짐승의 아이이니 때가 되면 날 거라고 답변해주는 것은 잘못이다. 자신이 옳고 선한 주체라는 믿음에 근거한 시혜적 평등을 선심쓰듯 주는 것이 과연 얼마나 평등의 본질에 가닿을 수 있을까. 부드럽다고 해서 오만과 독선이 아닌 게 아니다.
자연스러운 이물감과 불화의 감정을 억지로 무마하는 위선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다르다는 인식 자체를 막을 순 없다. 모든 걸 죄다 차별로 놓고 낙인찍어 억압하면 그건 그것대로 어둠의 고래가 되지 않을까. 괴물 양아버지와 서로에 대한 미움까지도 솔직하게 표출하고 맘껏 투닥거리며 성장한 인간소년 큐타는 어둠을 감당하고 승화한다. 그들 부자에게 사랑은 선행의 수단이 아니다. 그리하여 비슷한 처지에서 고래가 되어버린 이치로 히코마저 치유할 힘을 가진다. 송지연 우송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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