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 주위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적들과 명문전통부락들이 흩어져 있다. 그중 꼭 들러보고 싶었던 곳이 원천리 이육사 문학관과 하계마을이었다. 그런데 하계마을은 일행 중 지쳤거나 인문학에 무관심한 친구들이 있어 생략하고 이육사 문학관에만 들렀다. 문학관은 서원으로부터 뒤로 고개 너머 다소 먼 곳에 있었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문학관 마당에서는 대표작 중 하나인 '절정(絶頂)'을 배경으로 앉은 선생의 동상이 우리를 맞았다. 너무나 젊은 시절의 모습이라 안동에서 중고교를 다닌 필자에겐 마치 학창시절 선배님을 만난 느낌이었다.
문학관내 동선을 따라가다 보니 끝부분 방에 선생에게 영향을 끼친 분들에 관한 설명판이 있었다. 정신세계 형성에 영향을 끼친 분들로는 퇴계 이황(李滉), '어부사'의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월천(月川) 조목(趙穆) 선생 등이고, 독립정신을 일깨운 분들로는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항산 이만도(李晩燾), 봉경(鳳卿) 이원영(李源永) 선생 등이었다.
이육사 문학관/안동시청 제공 |
육사선생의 본명은 이원록(李源綠)이며 진성(眞城)이씨로 퇴계선생의 14세 손이다. 1904년 4월 4일 안동군 도산면 원천리, 엄격한 가풍의 선비집안에서 6형제 중 둘째로 태어나셨다. 타고난 강직한 성품으로 22세의 젊은 나이에 의열단 활동 등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중국을 오가며 전 후 17차례나 투옥을 반복했다. 귀국 후 기자생활과 시작(詩作), 논문, 시나리오 등 다양한 문필활동을 겸하며 생활했는데 '광야', '절정', '청포도' 등 일제에 저항적이며 상징성 강한 시들이 이때의 작품들이다. 그 후 장진홍(張鎭弘) 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르는데 이때의 수인번호가 264번이어서 육사(陸史)를 호(號)로 삼았다 한다.
1943년 다시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후 동대문경찰서에 체포, 중국으로 압송되어 1944년 베이징 감옥에서 거룩한 생을 마감하셨다. 퇴계선생의 14세 손으로 1904년 4월 4일 출생하여 1944년 생을 마감한 것과 수인번호 264번까지, 유독 '4'자와 인연이 많은 것이 무언가를 시사하는 듯하다.
대략 보았듯 안동은 전국에서 순국열사와 독립유공자가 가장 많은 지역이라 한다. 그야말로 대쪽 같은 정신의 항일애국의 고장이라 할 만하다.
금년은 건국 100주년, 3. 1독립운동 100주년의 해다. 그런데 3. 1절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국민은 없겠지만 3. 1절이 갖는 의미보다는 그저 하루 쉬는 날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일부이겠지만 요즘 우리의 미래인 젊은이들이 일본에 대해 너무 관대한 것 같기도 하다. 심지어 디자인이라며 욱일승천기가 그려진 셔츠를 입고 무대를 누비는 연예인들도 보인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에다 근세의 침탈로 그 말 못할 치욕을 당하고도 그러고 싶은지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다. 3. 1운동 100주년에 즈음하여 조국을 위해 한 몸 바치신 선현들을 본받아 우리 모두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에 관해 생각하고 각성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장준문/ 수필가,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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