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기의 행복찾기] 망각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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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기의 행복찾기] 망각의 시간

박광기 대전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승인 2018-12-28 00:00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사랑
게티 이미지 뱅크
어머니의 정밀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기억력이 급격하게 나빠지신 어머니가 얼마 전 종합정밀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제 나왔습니다. 어머니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계셨습니다. 알츠하이머는 이미 잘 알려진 것과 같이 기억력이 서서히 감소하고 나중에는 인지능력이 저하되어 치매현상을 일으키는 병입니다. 병원진단 결과는 이미 예상했던 것입니다. 그 동안 어머니의 증상이 바로 알츠하이머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그 동안 최근의 기억을 자주 잊어버리고 어떤 물음이나 판단을 반복적으로 하는 증상을 보여 왔습니다. 그리고 과거 오래된 일을 반복적으로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아마도 최근의 기억이 없기 때문에 과거 오래된 기억을 마치 현재의 것으로 판단하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최근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와 같이 정상적인 사람들에게는 사실 치명적입니다. 방금한 일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일상생활에서 사회적 활동을 하는 것이 불가능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물에 대한 판단이나 인지 능력이 저하되는 현상이 나타난다면 사실 사회생활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따라서 자신이 최근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아마도 일반인들의 경우에는 그것이 충격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한다는 것이 두려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제 어머니와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동안 어머니는 과거 자신이 섭섭했던 일들, 그리고 마음에 상처를 입었던 일들을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화가 치밀었던 이야기들을 주로 하셨습니다. 아마도 이런 것들이 어머니 자신에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는 모양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며 어머니께 앞으로는 좋은 기억만을 생각하시고 행복했고 좋았던 기억을 하시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말에 어머니는 살면서 좋은 기억보다는 잊어야 하는 나쁜 기억과 섭섭하고 마음 아팠던 기억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기쁘고 즐거웠던 기억은 사실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나쁜 기억과 슬프고 답답했던 일들은 참 오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잊어버린 것 같았던 나쁜 기억도 어떤 순간에 되살아나서 자기 자신을 괴롭히기도 합니다. 기쁘고 즐거웠고 행복했던 일들은 하루 이틀이 지나고 나면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그리고 다시 일상의 생활로 돌아와 힘들고 괴로운 일들에 시달리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삶이나 생활이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사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의 삶에서 대부분은 그래도 힘들지 않고 괴롭지 않고 슬프지 않은 시간들로 채워져 있을 것입니다.



그냥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시간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찌 보면 행복한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힘들고 괴롭고 슬픈 시간이 조금 지속된다고 하더라도, 어느 순간 우리는 그 시간을 보내고 다시 평범한 시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우리는 망각이라는 이름으로 잊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시간을 잊는 망각이 반드시 나쁜 것이고 부정적인 것일 수만은 없습니다. 잊어버리지 않고 모든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물론 엄청난 능력이고 또 행운입니다. 그러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적당히 잊고 사는 것도 또한 행복일 수 있습니다. 나쁘고 힘든 기억을 잊는 것은 그 반면 즐겁고 기쁜 것을 기억할 공간이 생기는 것이니 말입니다.

어머니께 기억을 잊는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굳이 기억나지 않는 것을 기억하려고 애쓰지 마시라고도 했습니다. 다만 즐겁고 기쁘고 행복했던 기억을 생각하시고 간직하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가슴 아프고 분노했던 것들은 이제 용서라는 것으로 털어버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야 좋은 추억과 행복한 기억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알츠하이머가 진행되면 아마도 어머니는 더 많은 기억을 잃어버리실 것입니다. 어머니가 잃어 버리게 될 기억들이 과거 나쁘고 힘들고 괴로웠던 기억들이기를 바랍니다. 물론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점차 어머니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기억들이 점점 줄어드는 현실에서, 어머니는 행복한 기억만을 가지고 계시기를 바랍니다. 어제 어머니와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내 스스로도 하지 못하는 일이지만, 그 동안의 일들에 대해 용서하고 인정하기를 바란다는 말씀도 드렸고, 그 말에 어머니는 그렇게 하시겠다고 다짐하셨습니다. 앞으로 좋은 기억과 행복한 시간만을 되새기고 기억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망각이라는 것이 가져다주는 두려움보다는 잊는 것에 대한 기쁨을 어머니가 느끼고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츠하이머의 원인은 아직 분명하지 않지만, 가족력이 발병의 주요한 원인이라고 알고 있기에 나 역시 이에 대비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에 앞서 어머니께 이런 병이 생기게 된 것도 어쩌면 미래의 내 모습을 어머니를 통해 일깨워주려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망보다는 용서를 해야 하고, 분노보다는 사랑으로, 오해하기보다는 이해하기를 먼저 한다는 것을 어머니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내 기억 속에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면, 아마도 미래의 나는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무엇인가를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리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망각이라는 것을 이기지 못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면, 그것이 결코 슬픈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망각이라는 것을 통해 잊어야 할 것을 잊는다는 것도 행복일 수 있을 것입니다. 기억을 점점 잊어버리는 어머니를 옆에서 바라보는 것은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즐겁고 행복한 것만을 기억하고 자신이 스스로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도 결코 나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점점 기억을 잊어버리는 어머니를 보면서 그래도 우리 자식들만은 오래도록 기억해 주시기를 바라는 욕심을 부려봅니다.

잊을 것은 잊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행복한 주말되시길 기원합니다.

대전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박광기 올림

박광기교수-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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