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톡] 망각의 위력을 저에게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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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톡] 망각의 위력을 저에게도 주소서

남상선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 승인 2018-12-14 00:00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망각
게티 이미지 뱅크
익을 대로 익어 산비탈에 구르는 상수리 한 알을 다람쥐가 물어다가 겨울용 먹이 감으로 땅 속에 묻어 놓았다. 다람쥐도 나이가 들다보니 건망증이 심했다. 다람쥐는 상수리를 땅에 묻은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다람쥐의 망각의 덕분에 상수리는 봄에 싹이 텄다. 여러 해가 지나자 그 싹은 상수리나무로 성장하여 다람쥐 1대 2대는 물론, 대대손손이 먹고서도 남을 만큼 굵고 영양 좋은 상수리가 많이 열렸다. 선조 다람쥐의 망각 덕분에 그 후손들은 굶어 죽지 않고 잘 살았다. 다람쥐 망각의 위력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건망증은 환영할 것이 못되지만 여기서 다람쥐의 망각은 위대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만약 묻어놓은 상수리가 다람쥐의 망각 없이 기억이 됐다면 그 상수리는 다람쥐 먹이가 되어 뱃속에 들어가 형체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다보면 망각이나 건망증은 불청객으로 찾아온다. 하지만 다람쥐의 망각은 오히려 위대한 결과를 만들어 냈으니 무조건 망각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거나 피하지는 말아야겠다.

음력 2월 초이레는 작은아버지 생신이다. 다른 때도 그냥 지나친 적은 없지만 금년 생신은 팔순이라 유난히 신경이 쓰였다. 사촌들과 상의 끝에 숙부님 팔순 피로연을 홍성에서 갖기로 했다. 음식점 피로연장에 가기 위해 운전석은 내 차지가 되었고 아내는 조수석에 앉았다. 승용차로 1시간 30분 정도 가는 거리라서 양복이 구겨질까봐 정장 차림을 하지 않고 수수한 평상복에다 운동화를 신었다. 피로연 장소는 서산 해미 넘어가는 길목 괜찮은 음식점이었다. 오전 11시쯤 되니 전국 각지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핏줄의 힘으로 지남철을 향한 쇠붙이처럼 모여들었다. 역시 핏줄의 힘은 지남철 같이 응집력이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촌 여동생 딸 6 가족에 우리 조카들 7남매 식구들이 다 모였다. 음식점에 모인 사촌과 우리 형제들 가족이 무려 50명 정도나 되었다. 꼬마들까지 합세하여 정신을 못 차릴 만큼 시끄럽고 요란스러웠다. 북새통에 음식이 입으로 제대로 들어갈지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식사와 여흥 시간으로 3시간이나 소요됐다. 여흥시간이 끝나자 바쁘게 사는 사람들이라 열차표 예매해 놓은 시간이 다 됐다고 서둘러 떠나는 사촌과 동생들도 있었다. 신발장의 구두와 운동화가 반 정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서두르지 않아도 될 사람만 남은 것 같았다.

이쯤 됐으면 나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출발하려고 신발장에서 구두를 찾았다. 그런데 구두가 보이질 않았다. 건성으로 주의력 없이 보아서 안 뵈는 줄 알았다. 잠시 후에 주의를 기울여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런 데도 보이질 않았다. 구두를 분실했다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긴장된 생각으로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모든 신발장을 살피기 시작했다. 역시 이번에도 보이질 않았다.

그러다 보니 떠날 사람은 다 떠나고 남은 숫자가 몇 안 되는 것 같았다. 남아 있는 구두가 몇 켤레 되지 않아 쉽게 찾을 줄 알았다. 그런데도 구두는 어디에 숨어 있는지 나오지 않고 스트레스만 주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음식점 주인을 오라해서 물어보기까지 했다. 여기서도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구두 찾는 시간으로 1시간은 그냥 지나간 것 같았다. 남아 있는 사람은 운전보조석에 앉아야 할 아내와 운전대 잡을 나밖에 없다. 신발장을 다시 바라보아도 구두는 보이질 않았다. 심란한 표정에 어찌 힐끗 쳐다보니 텅 빈 신발장에 있는 운동화 한 켤레가 눈에 띄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자세히 살펴보았다. 낯익은 운동화이었다. 운동화를 번쩍 들고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내 운동화임에 틀림없었다.

평상시 매일같이 구두만 신고 출퇴근하다가 운전한다고 집에다 구두를 벗어놓고 운동화를 신고 온 것이었다. 운전하는 데는 운동화가 제격이라고 운동화 신고 온 것을 생각 못한 것이었다. 운동화 신고 와서 구두를 찾았으니 없는 구두가 어디서 나올 수 있었으랴. 망각의 위력으로 자격증도 없는 코미디언이 되어 명품 쇼를 제대로 벌인 격이었다. 나이와 신분에 맞지 않는 쇼가 마냥 부끄러웠다.

망각으로 소동을 벌인 탓인지 망각에 관련된 다람쥐의 상수리 생각이 났다. 불현듯 다람쥐와 동격이 되고 싶었다. 그리하여 땅에 묻은 상수리를 망각하여 그 상수리가 싹이 트게 한 다람쥐 망각의 위대함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인간사 원망과 저주와 미워하는 마음이 땅에 묻은 다람쥐의 상수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원(恩怨)과 선악에서 원(怨)과 악은 망각되어 은혜와 선이 위대함으로 빛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

다람쥐 망각의 위력을 저에게도 주시어

망각의 위대함이 일어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사랑받지 못할 행동은 망각이 되게 하여 위대한 삶이 되게 하소서.

남상선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남상선210-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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