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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衣裳)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눈이 내린다. 소리없이 눈이 내린다. 온 세상 하얗게 눈이 내린다. 지상의 찌꺼기, 위선, 악을 덮는 눈이 소복소복 내리고 있다. 종착역을 향해 치달으던 기차도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이제야 눈을 감을 수 있겠다. 오늘 밤 안식처를 찾아 서둘러야 한다.
이 시를 읽으면 소화가 생각난다. 소설 '태백산맥'의 여인. 무당의 딸 소화는 어느 겨울, 느닷없는 정하진의 방문을 받고 결심한다. 하얀 꽃, 순결한 겨울의 여자. 오래도록 깊이 남몰래 간직한 순정한 사모의 연정을 비로소 펼쳐본다. 깊은 밤 겨울 골짜기에서 지친 발걸음으로 소화를 찾은 정하진과 소화. 적막을 깨는 건 남녀의 바스락거리는 옷 벗는 소리.
사르락 사르락. 오늘 밤에도 눈이 내릴 것이다. 이제 떠나야 한다.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기 전에 떠나자.
우난순 기자 rain4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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