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원역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작은 기차역이다. 경북 봉화에 있으며 지역 주민들이 만든 역이다. 사진= 우난순 기자 |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 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기차역은 사람의 인생유전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깊은 밤 썰렁한 역 대합실에 가보라.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의자에 엉덩이 한쪽 의지해 간신히 삶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 핏발 선 눈으로 어딘지 모르는 곳을 노려보는 사람. 온기 없는 스산한 역에서 그들이 가야 할 곳은 어디일까.
사평역은 현실에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시골 외딴 곳 어디든지 존재하는 곳이다. 시인이 25살 때 썼다는 '사평역에서'. 이 시를 매번 접할 때마다 경외감과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삶의 눅진함을 경험한 자만이 쓸 수 있는 시상을 청년이 썼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하긴 80년대 초에 썼으니까 야만적이고 끔찍한 광주항쟁이 지나간 우리 삶은 그 전과 후로 나뉠 수 있겠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침묵해야 한다는 것을/모두들 알고 있었다.'
이제 기나긴 겨울의 시작이다. 긴 침묵과 함께 밤열차 출발 준비에 나섰다. 서둘러 채비를 해야 겠다. 밤 12시 50분 남도행 완행 열차에 몸을 싣고 기찻간에 고단한 삶을 펼쳐보리라. 건너편 낯선 동행자 저편 유리창에 검은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싸르락 싸르락 난롯불 타는 소리만이 정적을 깬다. 난 무엇을 호명할까. 사평역이 멀지 않았다.
우난순 기자 rain4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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