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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처럼, 남자는 틀에 박힌 일상을 바쁘게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출장길 호텔방에서 숨이 막힐 듯한 통증을 느낀다. 그리고 순간 그 어떤 것도 기억해내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에 무슨 일로 와 있는지, 자기의 이름은 무엇인지.
다음 날, 그는 의사에게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듣는다. "누군가 우리를 내려다본다면 세상은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로, 그리고 그들을 놓친 영혼들로 가득 차 보일거예요. 영혼은 주인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으니까요." 그가 영혼을 잃어버려서, 지금 그에겐 영혼이 없다는 것이다. 의사의 처방대로 그날부터 남자는 도시 변두리의 작은 집에서 천천히 자신의 영혼을 기다리기 시작한다.
책은 왼쪽 페이지를 영혼의 공간, 오른쪽 페이지를 남자의 공간으로 삼았다. 연필 드로잉으로 섬세하게 그려진 일러스트는 낡고 빛바랜 배경으로 이어져 있다. 이 배경은 그림을 그린 요안나 콘세이요가 벼룩시장에서 구한 회계장부의 속지다. 반복적인 우리 일상을 닮은, 가지런하고 일정한 모눈이 그어져 있다. 까슬한 책 표지도 낡은 종이의 질감을 전한다. 온라인으로 글을 읽을 때 만지게 되는 스마트폰의 차가운 액정이나 마우스의 미끈함 대신 느낄 수 있는 온기다.
남자는 다시 영혼을 만났을까. 겹겹이 그어진 연필선에 감도는 아늑함은 책장을 넘기는 손끝을 멈추게 한다. 책을 펼치고 다 읽기까지, 아마도 영혼이 따라오는 속도와 비슷할 것이다.
박새롬 기자 ono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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