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지연 우송대 초빙교수 |
문학적 클리셰로 이용되는 가출 청소년의 이미지 - 예를 들어 십대의 범죄, 담배, 욕설, 임신, 낙태, 폭행 등은 물론 엄연한 현실이다. 하지만 여기에 리얼리즘을 빙자한 포르노그라피적 서술이 더해지면 얘기가 달라진다. 고만고만한 고민으로 전전긍긍하던 청소년기가 자극적이고 매혹적인 시기로 그려질 수도 있다. 누군가의 참혹한 사정을 선민의식으로써 연민하고 솜씨좋게 소비하는 경우, 독자의 눈을 사로잡은 불쾌와 당혹과 슬픔이 실은 심미적 흥분임을 자각하기란 어렵다.
어른들을 깨닫게 하고자 소환된 아이는 도구로 전락한다. 점잖은 책상물림에게는 반성의 도구가 되고, 거친 학창시절이 은근한 자랑거리인 자에겐 왕년에 나도 좀 놀았다는 무용담 과시의 도구가 되며, 위선자에겐 자신이야말로 불우한 아이들의 세계를 아는 진정한 어른임을 어필하기 위한 도구가 된다. 끝끝내 박제된 온갖 불행한 불량함이 다채롭고 애처롭다. "밑바닥 인생을 아냐"며 중산층 공교육 종사자들을 난데없이 까대는 레토릭은 지루하고, 공부만 해서 세상물정 모르는 유약한 선생들이 무서운 아이들에게 거꾸로 혼쭐이 나더라는 식의 레퍼토리는 신파극 되기 십상이다.
늘 그렇듯이 진짜 문제는 우리가 문제적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에 있기 마련이다. 시끄럽게 과장된 문제보다, 잠자코 얌전한 문제가 더 문제다.
<완득이>와 <데미안>을 비교해보련다. <완득이>는 <완득이>대로의 장점과 미덕을 가진 좋은 작품임을 잘 알면서도, 방향성 면에서 짚어볼 게 있어서이다. '난쏘공' 같은 가정환경에서 성장한 완득이와 다르게,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는 "어머니와 아버지, 사랑과 엄격함, 모범과 학교, 청결한 옷, 아침의 찬송가, 용서와 선한 원칙들"의 세계에 살며 그것을 인지하고 존중한다. 한편 그는 "하녀와 직공들, 스캔들, 도살장과 감옥, 악쓰는 여자들, 강도의 침입, 살인, 자살, 거칠고도 잔인한 일들, 아내를 패는 주정뱅이의 세계"를 훔쳐보며 그 세계에 호기심을 가진다.
왜 우린 청소년 성장서사라 하면 주먹 좀 쓰는 반항아의 이야기를 먼저 떠올렸던가. 소설 <데미안>의 설정에 기대자면 이야기의 주인공이 처음부터 두 번째 세계에 물들어 있는 셈인데, 정작 한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아이들은 부모와 선생, 미디어와 타인이 좋다고 하는 사지선다형 길 안에서 눈치보기 바쁘다. 어른들은 자신들도 잘 모르면서 이 길이 정답이라고 열렬히 가르친다. 아이들은 그 길을 무작정 좇는다. 거기서 어쩔 수 없이 벗어난 아이들이라 해도 다를 건 없다. 그 길의 차선책 중 하나는 택해야 하거나, 적어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이미 스스로 비슷한 롱패딩을 입는다. 다수를 따라하는 것은 안전하고 효율적이다. 집단의 규율을 벗어나 오롯한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과업은 한국의 어른들도 인생에서 제대로 해내본 적이 없음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똥주의 몽둥이 찜질에 기죽지 않는 완득이, 베트남 사람인 엄마와 장애인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가난하고 공부 못해도 싸움 잘하는 씩씩한 완득이란 어쩌면 어른들의 오래된 꿈이 반영된 소박한 신화적 자아상일지 모른다.
그에 반해 데미안의 헤집음에 혼란을 느껴 자꾸 '부모의 세계'로 돌아가고자 하는 싱클레어의 마음은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문장 이면에 의외로 매우 절실한 아이다움이 숨어있는 것이다. 옳다고 믿어온 종교적 전통의 가치 체계를 균열 내고 심지어 모독하는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괴롭혔던 프란츠 크로머의 불량함보다 악랄하다. 역시 데미안은 악마적인 선생이다. 그리고 그의 도움으로 알에서 깨어난 싱클레어는 범죄소년의 전형보다 무서운 존재다.
나의 이메일 주소에는 데미안 철자가 들어간다. 나는 선생으로서 싱클레어들의 데미안이고 싶다. 힘든 환경 속에서 좌충우돌하면서도 사람들과 교감할 줄 아는 완득이는 분명 사랑스러운 캐릭터이지만, 내가 완득이를 계도하다가 힐링받는 똥주이고 싶진 않다. 송지연 우송대 초빙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