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은 자음과 모음으로 우리를 분리했지만, 우리는 ‘한글’이라고 불립니다. 우리는 홀로 있을 때는 무의미하지만, 자음과 모음이 만나면 비로소 뜻이 있는 단어가 되고 문장에서 글이 되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10월 9일, 오늘은 한글날이죠.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해 세상에 펴낸 바로 그날입니다. 1926년에는 ‘가갸날’이라 불렸고 1928년부터 ‘한글날’로 바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국경일이자, 바로 우리의 생일입니다.
하지만 요즘 우리는 청년실업만큼이나 심각한 실업난을 체감하고 있습니다.
이제 10대는 우릴 심각해 왜곡하거나 본체만체하고, 경제와 사회 등 우리 생활을 이루는 모든 사물에서도 우리의 모습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572년 전통성에 대한 예우는 사라진 지 오랩니다.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아도 그저 말뿐. 우리는 해체되고, 찢기고, 반토막 나는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최근 중도일보 경제부 윤희진 부장과 이해미 기자의 대화가 기억이 납니다.
데스킹을 하던 윤희진 부장이 “SPA? 목욕하는 스파를 말하는 거야? 이게 패션하고 무슨 상관이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해미 기자는 “SPA는 Specialty store retailer Private label Apparel brand의 약자인데요. 제조부터 유통까지 다하는, 한마디로 fast 패션이라고 이해하시면 돼요”라고 했죠.
그런데 이해미 기자의 말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외래어가 가득합니다. 과연 SPA라는 단어를 패션과 연관 지어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외래어를 구성하고 있는 알파벳은 오래된 제 친구입니다만, 그들은 유독 우리를 시기 질투합니다.
드라이 에이징, 홈퍼니싱, 크래프트 비어, 플리플랍, 선블록… 유독 경제나 유통 기사를 읽다 보면 한글보다는 외래어 친구들의 단독 주연으로 등장합니다.
혹시 화장품 설명서 뒷면을 본 적이 있나요? 모이스춰 라이징, 미네랄 미스트, 퍼펙트 듀얼 커버 쿠션, 체리 블라썸… 읽기도 어렵네요. 역시나 여기에도 우리 말과 글은 단 한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음과 모음 정기 총회 날 하나의 안건이 올라왔습니다. 요즘 한글이 아닌 외래어 출장을 나가는 친구들이 한둘이 아니랍니다. 알고 보니 신문이나 방송은 물론 생활용어에까지 외래어가 등장했던 겁니다.
저도 압니다. 알파벳 친구는 멋지죠. 수십 억 인구가 사용하는 인지도가 높은 친구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밀어내고 그들이 한국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본다면 세종대왕님도, 집현전 학자들도, 일제 탄압 속에서 우리를 지켜낸 선조들도 슬퍼하지 않을까요.
한글 실업난 소식을 듣고 국립국어원이 나섰습니다.
자주 쓰이나 생소한 외래어를 우리말로 다듬어 우리말이 설 자리를 조금씩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드라이 에이징은 고기를 건식 또는 습식으로 숙성하는 기술 , 크래프트 비어는 수제 맥주로, 홈퍼니싱은 집 꾸미기, 블라인드 채용은 정보 가림 채용으로 순화했죠.
한글날을 맞아 자음과 모음이 힘을 합쳐 ‘적재적소’라는 말을 중도일보 독자 여러분에게 선물합니다.
외래어를 배척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말이 중심이 되고, 외래어가 적재적소에 등장할 때 한글도 외래어도 빛나지 않을까요. 이해미 기자 ham7239@
※이 기사는 취재 내용을 바탕으로 자음과 모음을 주인공으로 1인칭 시점에서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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