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길의 문화예술 들춰보기] 한가위 보름달이 부른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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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길의 문화예술 들춰보기] 한가위 보름달이 부른 기억

양동길 / 시인, 수필가

  • 승인 2018-09-28 00:00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누비옷은 옷감 두 겹 사이에 솜을 넣고 줄줄이 홈질하여 만든 옷을 말하더군요.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과학적인 공기흐름으로 보온효과가 뛰어나, 천연염색원단에 솜을 넣어 만드는 누비옷 기법이 국가 무형문화재 '누비장'으로 지정, 보전하고 있기도 합니다. 본래 스님들이 무소유를 실천하기 위해 넝마 조각을 기워서 만든 옷이라 하더군요. 지금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만, 천이 부족한 시절 이러저러한 헌옷가지를 누비거나 덧대서 입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누비가 패딩padding 만드는 기법에서 가져온 것이라 잘 못 알고 있더군요.

신윤복(申潤福, 1758년 ~ 1814년경, 조선후기 화가)이 그린 『연소답청年少踏靑』이란 풍속화가 있지요. 이른 봄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고 새싹이 돋는 호숫가로 반가의 젊은이 세 명이 기생 셋을 대동하여 들놀이 하는 모습입니다. 세 기생은 말을 타고 있고, 말구종도 두 명 보이는군요. 놀이 갔다 오는 장면일까요? 행색이 이미 흐트러져 있습니다. 진달래꽃을 머리에 꽂은 기생도 있고, 양반과 말구종이 모자를 바꾸어 쓰기도 하였습니다. 한 양반은 장죽에 불을 붙여 기생에게 건네기도 하는군요. 봄바람도 살짝 부나 봅니다. 간단한 필치지만 예리하게 특징을 잘 살려, 표정이나 동작에 모두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양반 옷매무새 볼라치면, 하나같이 도포 안에 누비옷으로 보이는 옷을 입고 있습니다. 조선 풍속도에도 누비가 등장하니 역사가 꽤 오래되나 봅니다.

누비옷을 주로 입다가, 중학교 들어가며 제대로 된 옷을 비로소 입었습니다. 처음 옷을 맞추어 입었지요. 내내 고무신 신다가 처음 운동화도 신었습니다.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크는 나이다보니, 모두 한 치수 큰 것으로 사 주셨지요. 처음엔 가랑이 끝을 접고 다녀야 했습니다. 운동화가 껄떡거려 발뒤꿈치 까지기가 일쑤였답니다. 상처가 아물고 발이 편해질 때면 신발이 헤어졌지요. 책도 사야 되고, 등록금도 내야 되고, 시골살림에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갔습니다.

예전 시골살림은 자급자족 형태였지요. 울안 손바닥만 한 남새밭이나 담장 옆 텃밭에 다양한 채소를 길렀습니다. 농사도 농사지만 각종 가축을 길렀지요. 소, 돼지, 개, 닭, 염소, 토끼, 오리, 거위 등과 함께 살았습니다. 줄로 매어놓거나 방목하는 것들도 있었지만, 닭장, 돼지우리, 외양간 등 오밀조밀 각기 사는 집도 마련되어있었지요. 직접 먹거리로 이용하기도 하고, 장에 내다 팔기도 하였습니다. 시골집 소 한 마리는 커다란 재산이었습니다. 급전이 필요하거나 대사가 있으면 소를 팔았지요. 중학교에 합격 후 기르던 소를 팔게 되었지요.



소와 함께 아버지 따라 20여리 되는 장터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갑니다. 소를 사고파는 우시장, 지금은 한갓진 곳으로 옮겨 가축시장으로 잘 정리되어있습니다. 당시엔, 가장자리로 기둥 몇 개, 듬성듬성 말뚝이 박혀 있던 게 다였던 것 같습니다. 특별한 기억보단 소와 사람이 섞여 몹시 혼잡했지요. 장터 구경에 늦겨울 추위도 잊습니다. 소는 소대로 거품 물고 침 질질 흘리며 허연 입김 거세게 내 품었지요. 머리 쳐들고 소리 지르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흥정 끝나고 소가 팔리면 소는 까맣게 잊고 바삐 자리를 뜨더군요. 점심시간이 살짝 지났습니다. 장터 근처엔 주막거리가 있었지요. 끝 쪽 2층 건물 중국요리 집, 아버지께서 짜장면 곱빼기 사주셨지요.

소 키우려면, 먹이 마련을 위해 하절기엔 꼴을 베어야 하지요. 겨울이면 거의 매일 작두질하였습니다. 짚 단 몇 개 가져다 아버지는 작두에 먹이고, 필자는 힘차게 눌러 짚을 5센티 내외로 잘랐습니다. 가마솥에 가득 넣고, 쌀겨 한 바가지에 물 한 동이, 때로는 콩깍지나 다른 음식물 잔해도 넣었습니다. 펄펄 끓여 소에게 주었지요. 보기에도 모난데 하나 없이 순수하고 우직하기만 한 소가, 큰 얼굴로 여물통안 저으며 맛있게 먹는 모습, 새록새록 정이 들었지요.

짜장면 비비려 들여다 본 투박한 그릇에, 깜박 잊었던 소와의 정이 소복이 담겨있었지요. 물기 어린 채, 한없이 껌벅거리던 순진무구한 소 눈이 그릇을 휘휘 저었습니다. 처음 먹어 본 짜장면, 아니 중화요리가 처음이었지요. 그 맛이 어찌나 경이로웠는지 금세 또 그 뜨거운 정을 잊고 말았지요. 아직도 그 눈빛을 잊지 못하지만, 짜장면 맛도 잊힐 리가 없습니다. 그 보다 맛있는 먹거리 여태 만나지 못했습니다.

첫인상도 중요하지만, 뜻하지 않게 깊은 인상(印象)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한자표기 의미처럼 마음속에 도장 같은 그림(image)을 남기는 것입니다. 깊은 느낌은 잘 바뀌지 않지요. 울림이 되고 오래오래 마음에 남겨 집니다. 그 경이로움이 입맛을 바꾸기도, 삶의 방식이나 행태를 바꾸기도 합니다. 인생을 바꾸는 것이지요.

달
게티 이미지 뱅크
한가위 명절, 밤이 되자 날이 제법 쌀쌀하더군요. 찬란한 별들과 어우러진 환한 보름달을 바라봅니다. 울안과 마을은 모두 바뀌었지만, 하늘은 꿈을 키우던 그 시절 그 모습 그대로였어요. 소원 빌기보다, 변함없는 형상에 절로 숙연해 지더군요. 오랜만에 아이들 만나면서 저들에게 어떤 인상을 남겼나, 남기게 되나 생각해 봅니다.

양동길 / 시인, 수필가

양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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