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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도 아닌 죽은 자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알고 보면 죽음은 그리 엄숙하지도 않나 보다.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죽음은 늘 내 곁에 삶처럼 가까이 존재한다. 죽고 난 후의 내 팬티가 어떤지, 남에게 보여질 내 몸이 어떨지 걱정하다니. 죽음은 사소할 수도 있구나 새삼 알게 된다. 여고시절 가정 선생님은 종종 여자는 속옷을 깨끗이 입어야 한다, 교통사고라도 나서 병원에 실려가 의사 간호사 등이 볼 때 속옷이 더러우면 얼마나 창피한 일이냐라고 강조했다. 특히 여학교, 그것도 가정 선생님은 여성의 정숙함, 순결을 강조했다. 오규원의 시가 성차별적인 문제로 비화되어 뜬금없어 보이지만 말이다.
사람의 죽음을 알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속옷에서 확인할 수 있다. 괄약근이 이완돼 대장에 남아 있던 똥이 나온다는 거다. 비로소 인간의 죽음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병원에서 가족의 죽음을 맞은 사람은 다 알 것이다. 누구나 생각하는 문제 아닐까. 내가 죽은 후의 모습은 어떨까. 왜 지극히 사소한 그것이 염려될까. 사는 건, 죽는다는 건 참으로 어이없고 황망하다.
우난순 기자 rain4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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