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톡] 어머니 젖의 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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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톡] 어머니 젖의 위력

남상선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 승인 2018-09-09 11:40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어보니 대전가정법원에서 온 특별우편물이었다. 법원에서 조정위원한테 의례적으로 보내는 우편물이지만 이것은 아주 중요한 내용물임에 틀림없다. 성공적인 조정을 위한 원고의 소장과 피고의 답변 내용이 들어 있는 우편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소장 내용을 요약해 가면서 조정방향을 어떻게 할 것인지 깊은 생각에 빠졌다. 결론은 원·피고를 감동 감화로써 설득시켜 이의 없는 합의를 유도하는 것이 지름길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번 조정 건은 편모슬하에 있는 5남매간 유산 상속 싸움이었다. 편모슬하에 살던 원· 피고 5남매는 장성·결혼해서 분가했다. 그러던 중 생모가 돌아가신 후 핏줄 간에 유산 상속 싸움이 벌어진 것이었다. 망인의 유산은 여기저기 각처의 전답에다 과수원도 있고 임야와 경영하던 음식점까지 합하면 수억 재산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다.

5남매 중 장남은 개성이 강하고 뚝심 센 옹고집의 농부였고 둘째는 명망 있는 사업가로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었으며 셋째는 주먹 좀 잘 쓸 것 같은 놀고먹는 한량이었다. 거기다 넷째는 재력 있는 알부자 부동산 업자였고 막내딸은 음식점을 경영하는 요식업자였다.



나는 이틀의 고심 끝에 조정 방향 설정을 끝냈다. 원고 피고에게 들려 줄 감동 감화시킬 자료 준비를 끝냄에 기획 설정이 다 된 셈이었다. 최근에 봤던 개싸움을 이야기로 시작해서 형제투금(兄弟投金) 고사로 마음을 약하게 만든 다음 정철의 훈민가로 감화시켜 합의를 유도해야겠다는 다짐이 섰다.

조정 날짜와 시간이 임박해 왔다. 법원으로 출발하기 전에 청원기도를 올리고 법원조정실로 향했다. 기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늘 남상선 요셉의 조정을 받는 원고 피고가 10분 이내로 감동감화 설득이 되어 이의 없이 합의할 수 있게 하는 화법기술과 조정기술 노하우를 터득하여 남상선 것이 될 수 있게 해 주시고, 원·피고를 설득할 수 있는 지혜와 힘과 총명을 주소서. 부족한 것은 주님의 은총과 자비로 채워 주시고 살펴 주소서. 남상선의 조정을 받는 원고 피고가 이의 없이 합의할 수 있게 해 주시어 이들이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줄이고 평생 동안 평화경속의 행복한 삶이 될 수 있게 해 주소서.」

조정을 수차례 해 보았지만 이번도 예외 없이 수험생 같은 초조와 긴장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오전 10시에 대전가정법원 조정실에 도착했다. 조정실에는 원·피고 5명에다 남녀 조정위원 2명, 원고측 법정대리인(변호사) 1명 모두 8명이었다. 먼저 선임 여조정위원의 발언으로 조정이 시작됐다. 뒤를 이어 나는 며칠 동안 준비한 유인물을 조정 관련자들에게 나눠주고 읽어 보라고 했다. 잠시 후 원·피고를 감동 감화시킬 목적으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최근에 봤던 개싸움 이야기를 5남매 원고 피고한테 들려주었다.

지나다 보니 개 두 마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섭게 싸우고 있었다. 주인이 나와서 뒤얽힌 개를 떼어놓으려 해도 막무가내였다. 개주인 김달수 부부는 요양원에 모셨던 모친이 돌아가셨다는 부음(訃音)에 장례식장을 허겁지겁 달려갔다가 사흘 만에 돌아왔다. 장례를 치르고 와 보니 집에 있는 개를 챙기지 못한 것을 알게 되었다. 개들이 사흘 정도 굶주림으로 죽을 지경이었다. 주인이 먹이를 주니 개 두 마리가 정신없이 먹다가 싸움이 벌어졌다. 사흘 동안의 굶주림에 먹이에만 집착한 전쟁 같은 큰 싸움이었다.

평상시는 친형제처럼 사이좋게 지내던 개 두 미리가 사흘 정도 굶다 보니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본능에만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 시장기 앞에서는 동료도 형제도 배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개 두 마리는 허겁지겁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몰두하다가 필사적인 싸움을 벌였다. 평상시엔 온순하고 사이좋았던 것들이 사흘간 시장기로 도배된 그 자리엔 정말 먹을 것을 챙기기에 급급한 개들이었다. 개들의 뱃속이 곡기 없는 사흘이란 인내하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허기진 사흘이라 그런지 뒤얽힌 싸움은 개싸움이 아니라 무서운 늑대 싸움을 방불케 했다. 서로 물어뜯고 뜯기고 유혈이 낭자였다.

싸움에 몰두한 개 두 마리는 싸움을 말리는 주인은 안중에도 없었다. 주인의 얘기를 듣고 싸움을 그쳤더라면 배부르게 먹고 몸에 상처도 나지 않았을 터인데…….

개싸움 이야기를 끝내고 5남매의 표정과 말하는 태도를 살폈다. 처음 강경하게 나왔던 발언들은 수그러들었고 고집스런 얘기도 어느 정도는 잠재운 듯싶었다.

순간 고려시대 있었던 형제투금 고사를 들려주며 분위기와 표정 탐색에 들어갔다.

'형제투금(兄弟投金) - 형제 우애'

고려 공민왕 때에 형제(이억년, 이조년)가 길을 가다가 동생 이조년이 금덩이 2개를 주웠다. 동생은 그 중 하나를 형에게 주고, 자신도 하나를 가지고 나루터에 와서 함께 배를 탔다. 강을 건너는 중 동생이 갑자기 자신이 가진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 버렸다. 형이 동생의 행동을 이상히 여겨 그 이유를 묻자, 동생이 하는 말이 "저는 원래 형을 매우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이 금덩이를 보자 형을 시기하는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 이 금덩이는 분명히 좋지 못한 물건입니다. 그래서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 저의 나쁜 마음이 더 이상 생기지 않게 하려고 금덩이를 강물에 버렸습니다."

사실 형도 동생과 같은 마음이었다. 그런데다 동생의 이런 말까지 들으니 형은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형은 동생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금덩이도 강물에 던져버렸다.

이야기가 끝나고 금덩이보다 우애를 중시한 고사 주인공 이조년과 이억년을 칭찬하고 이야기 청취 반응을 물었다. 큰 소리로 얘기를 못하지만 자신들의 재산 싸움을 부끄러워하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법원 조정실 들어올 때의 표정이나 태도와는 사뭇 달라져 보임에 자신감과 희망이 생겼다. 마지막 준비한 자료 훈민가를 가지고 마무리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형아 아우야' - 훈민가(정철)

형아 아우야 네 살을 만져보아라.(형아 아우야 네 살을 만져보아라)

뉘손에 태어났관대 모양조차 같을손가.(누구한테서 태어났기에 모양조차 같으냐? )

한 젖 먹고 길러 나서 딴 마음을 먹지 마라.(어머니 한 젖 먹고 자라나서 어찌 딴 생각을 할 수 있겠느냐?)

이상의 훈민가를 설명하고 내용에 살을 붙여 감화로 들어갔다. 정서에 호소하는 감동감화 설득에 들어간 셈이다.

잠시 후에 표정과 말하는 태도를 보니 법원조정실에 들어올 때와는 사뭇 현저한 차이가 났다. 때를 놓칠세라 마무리 설득에 들어갔다.

"합의가 안 되어 판사의 판결까지 가서 강제 집행에 의한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보고 동기간에 원수 되는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합의로써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줄이고 한 어머니 젖을 빨고 자란 동기간 핏줄의 인연을 살리시겠습니까? 현명한 판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5분 정도 침묵의 시간이 지난 뒤 원고가 고소를 취하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잠시 후에 울상이 되었던 오빠와 여동생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조정위원들이 하라는 대로 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소송 대리인도 조정위원들도 얼굴에 만면의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오늘의 조정은 어머니 젖의 위력이 공훈 가운데 수훈 감이었다.

형제 싸움이 개싸움이 되지 않은 것은 어렸을 때 같이 물고 빨았던 어머니 젖의 위력이었다.

같이 빨고 자란 어머니 젖으로 맺어진 같은 핏줄의 맥박 앞에선 형의 고집도 아우의 사회적 지위도 힘센 팔뚝의 완력도 힘을 못 쓰는 것이었다.

어머니 젖줄의 위력 앞에선 당당했던 위세도 금력도 완력도 약해져서 떵떵거리던 큰 소리가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역시 어머니 젖의 위력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큰 것이었다. 재산 싸움에 눈이 벌게졌던 형제들이 어머니 젖으로 맺어진 핏줄의 인연 앞에선 양같이 순해질 수밖에 없었다. 거센 불협화음도 유연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어머니 젖의 위력은 세상에서 제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렸을 때 우리가 빨았던 어머니의 젖은 그 어떤 권세도, 금력도, 완력도, 협박도 꼼짝 못하게 하는 위력을 가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부지 어렸을 때 먹고 자란 어머니의 젖은 위대하여라 !

어머니 젖의 위력은 법정에서도 다시 볼 수 없는 장원감이었다.

어머니 젖의 위력은 천상천하 제일가는 훈장 감에 틀림없는 것이었다.

법정 형제 싸움이 개싸움이 되지 않은 것은 어렸을 때 같이 빨았던 어머니 젖의 위력 때문이었다.

동기간 핏줄에 불변의 맥박이 뛰게 하는 어머니 젖은 위대하여라!

옥좌와 권좌 위의 어떤 사람도 마음 약하게 하는 어머니 젖은 위대하여라!

혹한의 세상도 따뜻한 가슴과 동기간 피로 하나 되게 하는 어머니 젖은 위대하여라!

남상선수필가 수정
남상선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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