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숙빈 을지대 간호대학장 |
선행연구들에 따르면 우울한 한국의 중년여성들은 자기의 삶에 자기가 없는 것 같고 그동안 바보처럼 산 것 같은 상실감에 괴로워하고, 주변 사람과 관계도 끊어진 채 과거에 매여 살며 소통의 부재로 고통 받는다. 그래서 삶이 버겁고, 외롭고, 후회스럽고, 원망스러워 죽음도 생각한다고 했다. 중년기를 제 2의 사춘기라고도 말하니 그 불안정이 짐작되고도 남지 않겠는가.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우울은 속이 텅 빈 채 무감각하고 무기력해져서 다른 사람과 소통도 관계도 할 수 없으며 스스로 시작할 수 있는 자발성도 잃어버리는 상태이다. 자기 자신에게 침몰해 있는 상태라고도 하겠다. 그러니 여성의 우울은 자녀와의 상호작용에도 대단한 영향을 미쳐 세대에 걸치는 건강문제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G교수는 유대인이며 독일의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을 인용하며 '용서'가 해답의 시작이라고 강조하였다. 용서(容恕)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른 사람의 과오를 더 이상 책망하지 않는 것이라고 나와 있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용서는 자신이 무엇을 행했는지 알지 못하고, 행한 것을 되돌릴 수 없는 곤경에서 벗어나 다시 행위를 시작하게 하는 능력이다. 다시 말해 타인을 향해 자기 마음을 변화시켜서 다시 시작하려는 부단한 의지의 표현이 용서라는 것이다. 여기에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져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관점으로 전환하게 하는 능력, 즉 판단력이 더해지면 타인과 함께 하는 세상에서 자기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회복된다는 것이다. 스스로 지쳐서 자기 안에 갇혀 있던 사람이 세상을 향해 문을 열고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용서는 새로운 나,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는 새로운 탄생이다. 하지만 손가락 움직일 힘, 의지조차 없는 우울한 사람이 용서를 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함께 거들어주어야만 가능해질 것이다. 그래서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한 자리에 모여 생각을 나누고 마음을 모으려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잘 알다시피 어머니 태내에서 나오는 '신체적 탄생', 세 살 무렵의 '심리적 탄생', 학교 갈 즈음 일어나는 '사회적 탄생' 말고도, 이제 우리는 또 다른 탄생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하겠다.
흔한 우울의 예로 사람으로 인한 상처에 용서는 상처를 입힌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기실 용서는 상처 입은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용서하거나 하지 않는 것은 오롯이 상처 입은 사람이 정하는 게 맞다. 누가 용서를 해라 마라 할 수 없다, 아니 그렇게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 상처는 그렇게 쉽게 낫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용서하고 화해하라고 서두르지도 말고 용서하면 될 것을 왜 하지 않느냐고 떠밀지도 말아야 한다. 지켜줄 뿐이다. 김재진이 읊듯 치유의 순간이 그렇게 그 사람에게 들어설 때까지...
한 줄의 편지 쓰고 싶은 날 있듯 / 누군가 용서하고 싶은 날 있다. / 견딜 수 없던 마음 갑자기 풀어지고 / 이해할 수 없던 사람이 문득 / 이해되어질 때 있다...... 중략 ..... 세파에 부대껴 / 마음 젖지 않는 날 드물고 / 더 이상 물러설 데 없는 벼랑에 서보면 / 용서할 수 없던 사람들이 문득 / 용서하고 싶어질 때 있다. - 김재진 - 임숙빈 을지대 간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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