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도 미술비평가 |
미디어 시대에 우리는 '가짜뉴스'가 우리 삶의 판단을 왜곡시키는 정보의 소스가 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가짜뉴스가 제공하는 허구가 얼마나 황당한 스토리로 짜여 있든지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런 뉴스의 논리적 허접함과 비상식적 구조는 외면한 채 가짜 뉴스가 제공하는 자극적 이야기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황당함을 넘어 억울할 정도로 답답한 것은 그렇게 회자되던 정보들이 다수가 인정하는 가짜라고 밝혀지면 인터넷 정보의 헤드라인에서는 사라지지만 객관성을 가장한 그런 뉴스의 중심에서 거론되던 사람들에게는 삶의 아물지 않는 심각한 상처를 주게 되고, 가짜뉴스를 통해 그들을 바라보았던 타인들에게도 자극적이기에 강렬했던 부정적 인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고 잔상처럼 남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왜곡은 어떤 기회를 통해 다시 반복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칸트 이후 많은 철학자들은 객관적이라는 절대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객관성은 모든 사람들의 경험적 판단을 넘어서는 진리 같은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에게는 물리적인 현상들마저도 언제나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계를 맞이한 기술들은 새로운 기술에 의해 그 한계를 계속 극복해 왔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그래 왔고 컴퓨터 산업이 그래 왔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은 사실 비현실적인 상상이다.
민주주의 사회의 공적 영역은 다수의 합의를 그 근거로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객관적 기준들은 개인의 다양한 관심에 의해 계속 수정돼 왔다. 자본의 평등한 분배는 현대의 금융산업과 부동산 경제와 같은 새로운 관심들에 의해 고전적인 방식의 단순한 나누기 구조로는 불가능해졌다. 새로운 가치 구조에 따라 수정되어야만 한다.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공적 영역과 사적인 영역의 충돌은 시장자본주의가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재구성해야만 하는 문제가 되었다. 현대 사회에서 정신적인 가치를 과하게 주장하게 되면 오히려 자본의 불평등을 방관하고 사회적 변화의 핵심적 쟁점들을 간과하는 결과가 초래된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진실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 사실 진실은 선명하지 않다. 예술이 진리와 가까이 있다는 것도 예술이 진리를 선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진리의 애매한 영역을 상상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예술적 상상력은 삶의 희망과 관계있다. 사실 아무것도 정해진 것은 없다. 변화를 포용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방법들을 지속적으로 발견해야만 한다.
정용도 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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