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제공 |
'물론 나는 남편이 일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도, 그리고 그 일기장을 책상 서랍에 넣고 열쇠로 잠근다는 사실도, 또 그 열쇠를 어떨 때는 책장의 여러 책들 사이에, 어떨 때는 카펫 밑에 숨긴다는 사실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남편이 오늘 그 열쇠를 떨어뜨려 놓고 간 것은 웬일일까? 심경에 뭔가 변화가 일어나서 내게 일기를 읽힐 필요가 생긴 것일까?' -본문에서
대학 교수인 초로의 남편과 팜파탈의 매력을 잠재한 양갓집 출신의 아내가 정월부터 각자 일기를 쓴다. 권태기에 이른 부부의 일기에는 현재의 성생활에 대한 속내가 담겼다. 부부는 서로 상대의 일기를 훔쳐보지 않겠노라 다짐하지만, 반대로 상대방은 자신의 일기를 읽어 봐주길 바란다.
부부의 아슬아슬한 분위기는 두 사람의 집을 자주 찾는 딸과 딸의 애인까지 합세하며 긴장감을 더한다. 남편은 딸의 애인과 아내의 관계를 상상하고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일기라는 형식이 주는 관음증적인 충동, 반전의 스릴러가 가득하다.
'열쇠'는 '쏜살문고 다니자키 준이치로 선집' 중 여덟 번째 작품이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기본적으로는 에로티시즘, 마조히즘, 페티시즘을 글의 바탕으로 삼았지만 다양한 문체와 주제, 형식을 넘나들며 문학의 지평을 확장했다. 국내에 많이 알려진 편은 아니지만 일본 문학의 주요 인사들이 앞다투어 상찬하는 작가다.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그가 "좀 더 살았더라면 분명 노벨문학상을 탔을 것"이라고 평했으며 무라카미 하루키는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국민 작가'라 할 만하다. 나는 그처럼 문장력이 뛰어난 작가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노벨 문학상 후보에 여섯 차례 넘게 지명됐다.
이번 선집은 전체 열 권으로, 이번에 일곱 권이 먼저 나왔다. '여뀌 먹는 벌레','무주공 비화','음예 예찬' 세 권이 12월에 출간된다. 일본의 민화를 연상하게 하는 각 권의 표지그림도 인상적이다. 열 권을 순서대로 이으면 병풍을 펼친 듯 연결되는 농염한 분위기의 일러스트가 선집에 미적 가치를 더한다.
박새롬 기자 onoino@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