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지연 우송대 초빙교수 |
"비루한 욕망"이란 무엇일까. 모든 욕망이 비루하다는 뜻일까. 그렇지 않다면 비루한 욕망이 따로 있다는 얘기일 텐데, 그것은 왜 비루한가. "탈을 쓴 권세욕"은 또 무슨 말이란 말인가. 위선자들의 정의감 가득해 보이는 주장이나, 위악자들의 뒤틀린 인정욕구에서도 우린 그 '탈 또는 가면'을 느낄 수 있다. 정치적 격변기에 권세를 잡아 개인적 결핍과 복수심을, 사회적 대의로 풀어 일시에 소거하고 말겠다는 그 욕망이 비루한 것이려나. "섹스뿐"이라는 진단은 더 난감하다. 섹스를 부정적으로 쓴 최인훈은 어쩔 수 없이 꽉 막힌 옛날 사람인 걸까.
국문학박사 체면에 당장 모범답안이라도 만들어야 할 것 같지만, 엉뚱하게도 50년을 뛰어넘어 발표된 노래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밴드 '브로콜리 너마저'의 <졸업>이라는 노래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그 어떤 신비로운 가능성도 희망도 찾지 못해 방황하던 청년들은 쫓기듯 어학연수를 떠나고 / 꿈에서 아직 덜 깬 아이들은 내일이면 모든 게 끝날 듯 짝짓기에 몰두했지." 댄스 클럽에서 밤새 일회용 짝짓기에 몰두하는 것도, 짝짓기 대신 인터넷에서 젠더 이슈로 싸우는 데 에너지를 쏟는 것도, 성적으로 과장된 이미지의 연예인에게 열광하는 것까지 – 과연 나름대로 "섹스뿐"인 모습들이 아닌가. 우연하고도 공교롭게 겹친다.
"청년들은, 섹스와 재즈와 그림 속의 미국 여배우의 젖가슴에 허덕이지 않으면, 재빨리 외국인을 친지로 삼아서 외국으로 내빼고 있었습니다. 유학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그 험한 사회의 혼탁에서 잠시 몸을 빼고, 한 살림 꾸릴 수 있는 간판과 기술을 얻기 위해서, 외국으로 간 것입니다." <광장>의 작가가 단지 글로벌 감각이 부족해서 섹스와 외국 유학을 문제 삼은 건 아니라고 본다. <졸업>이라는 노래가 요즘의 언어로 들려주는 어학연수와 짝짓기에 대한 접근도 막상 비슷한 문제의식임을 이해하고 보면 납득이 되는 구석이 있다. 이러한 연관성은 <광장>의 고전적 생명력을 증명한다. 한편 1960년대 즈음의 시대적 과업으로 여겨진 것들이 여전히 근본적으로는 해결되지 않았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는 <광장>을 여러 번 개작했다.
이명준은 월북 후, 개인주의적 정신을 버리라는 편집장의 주문 앞에서 무력했다. '당'만이 주인공인 전체주의 사회에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은 위대한 동무들이 먼저 말했고, 그러니 자신은 복창해야만 하고, 이제는 아무도 위대해질 수 없는 사회. 북한에 대한 비판적 통찰 또한 집단성에 결부된 현재 한국 사회의 어느 단면을 날카롭게 찌르고 있다. 최인훈 선생님, 우리는 언제 <광장>을 <졸업>할 수 있을까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송지연 우송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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