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길 작가(맨 오른쪽)가 유성5일장 상인들과 사진을 찍고 있다. |
일단 깎는 게 그의 일이다. 유성장 안에 자리한 '명자네 전집'은 문 닫을 시간이 임박하자 비틀즈의 'let it be'를 틀었다. 마지막 손님이었던 일행은 주섬주섬 일어나 계산대로 향했고 서로 계산하겠다고 우겼다. 흔한 장면은 여느 술자리와 같았지만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가격을 흥정하는 것이었다. 전국 장터란 장터는 모두 돌아다니며 시장 사람들을 만난 이수길(57·사진) 작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풍경이다.
10여년째 전국 535곳의 장터를 순례한 이수길 작가가 지난 24일 대전을 찾았다. 대전충남녹색연합 인문학 소모임에 초청돼 그의 장터 이야기를 소개하기 위해서다. 대전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유성5일장에서 소모임 회원들은 장터를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다.
37.7℃의 무더운 날씨에 소모임은 소수 정예 인원만의 참석으로 진행됐다. 오후 5시께 모인 이들은 장터 내 곡물 가게에 방문해 그곳의 이야기를 들었다. 84세 어머니의 평생 터전이었던 가게를 아들 이동관(55) 씨와 그의 부인이 이어받아 운영 중이다. 장터에서의 일이 녹록진 않지만 평생 이 장사로 자신을 키운 어머니를 생각하면 힘이 난다는 이 씨의 말에 회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날 모임에선 지난해 출간한 이 작가의 '어무이, 비 오는 날은 나가지 마이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전국 장터를 돌아다니며 겪은 수많은 에피소드 중 추리고 추려낸 88개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2008년 일본에서의 유학 마치고 귀국한 이 작가는 전국 각지의 5일장을 찾아다녔다. 장인정신이 계승되는 일본과 달리 사라지는 게 많은 한국사회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한 장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며 무려 535곳의 장을 방문했다. 그중엔 현재 30곳가량은 사라져버렸다.
이 작가는 이후 없어질지도 모르는 시골 장터를 기록하고 이것을 자료로 만들어 많은 이들에게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 5월엔 대전 중일고에서 초청강연과 체험학습을 진행하며 학생들에게 장터 문화를 전파했다.
이 작가는 앞으로도 청소년을 비롯해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장터 이야기를 알리는 활동을 이어갈 예정이다. 그는 "사람들과 인연을 맺으며 아름다운 이야기로 공감대가 형성돼 행복한 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김은정 대전충남녹색연합 공동대표는 "어린 시절 엄마 등에 업혀 갔던 서천장이 떠오른 시간이었다"며 "장터의 '장인'들이 우리나라와 그 자식들을 키웠다. 이 작가를 통해 그런 정신을 접할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이날 유성장 투어를 마친 일행은 파장 때까지 '명자네 전집' 한 쪽에서 이야기꽃을 피워댔다. 이야기는 시장에서 시작해 시장에서 끝났다. 만물이 있는 장이 곧 인간사의 축소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니 말이다. 이날 이 작가의 흥정에 명자 씨는 과연 베테랑 장인다운 면모를 보였다. 가격을 깎으려는 이가 민망하지 않게 하면서도 장사를 밑질 수는 없다는 듯 단돈 1000원을 덜받았다. 그도 좋다는 이 작가는 호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임효인 기자
대전충남녹색연합 인문학 소모임 회원들의 5일장 투어 모습. |
2대째 운영하고 있는 유성장의 한 곡물가게서 인문학 소모임 회원들. |
지난 5월 중일고 학생들과 함께한 시장투어 모습. |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