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진 부장 |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그때는 시험 기간에는 강의가 없었다. 시험공부에 열중하라는 의미였지만, 워낙 다양성이 존중되는 곳이라 각자의 취향에 맞게 활용했다.
시험 기간, 잔디밭에서 막걸리와 두부김치를 즐기는 학생들은 쉽게 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물론 도서관에서, 과제도서실에서, 강의실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도 많았다.
‘막걸리파’ 중에는 오전 시험을 끝낸 학생도 있지만, 지나가다가 누군가의 부름에 응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날이었다. ‘역사학개론’ 시험을 위해 빈 강의실을 찾던 새내기 후배를 햇살 아래 판을 펼친 선배들이 불렀다.
한 사발 마시면 글자가 머리에 ‘확’ 박힌다는 근거 없는 말로 종이컵을 내밀었다. 그렇게 대여섯 잔을 마셨다. ‘잠깐이면 되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시험이 예정된 강의실에 도착한 건 시작 5분 전이었다.
몽롱함 속에 후회의 한숨을 쏟아내고 있을 때 8절지 크기의 시험지가 책상 위에 도착했다. 곧바로 담당 교수는 칠판에 문제를 썼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는 누구인가’ 등 단답형이나, 기껏해야 약술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문제를 본 순간 눈을 의심했다.
칠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에 대해 서술하시오’
역사적 사건의 배경에 여성이 있다는 의미로 보기도 하지만,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결정된다는 것으로 보는 게 맞을 듯싶다. 진실은 밝혀지기 쉽지 않다고 해석할 때 주로 쓰인다.
좋든 싫든 기록될만한 많은 역사적 사건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결정됐다. 공식 발표는 보이지 않는 곳을 후에 나오는 형식에 불과할 뿐이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사건 또는 권력자에 따라 밀약이나 야합 등 부정적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정사(正史)보다 야사(野史)와 가깝다. 정사는 사전적 의미로 근거가 있는, 정확히 기록된 역사다. 또한, 승자들의 거짓말이기도 하다. 논점에 따라 조작과 왜곡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도 승자가 기록하기 때문이다.
멀리 가지 않고 최근의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건을 비롯해 국정원 댓글조작과 기무사의 계엄령 문건, 대법원 재판거래 의혹 등만 봐도 그렇다. 정의가 승리하는지, 승리한 것이 정의인지는 구별이 쉽지 않다.
혹자는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에 지우개는 없다. 당장은 지우거나, 숨길 수 있지만 언젠간 드러나기 마련이다.
오늘도 나라와 국민의 운명을 좌우하는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난다. 어제도 그랬고, 내일도 그럴 것이다.
청와대와 국회, 정부부처, 지방자치단체와 지방의회 등 정치권력은 물론 대기업과 재벌 등 경제권력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산하고 따지고, 또다시 확인할 것이다. 공개하고 드러나면 바꾸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얘기도 머지않아 세상 밖으로 나오는 시대다. 밤에 이뤄지는 역사도 기억되고 기록되기 마련이다. 그게 바로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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