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기의 행복찾기] 가장 작은 순간의 행복

  • 오피니언
  • 여론광장

[박광기의 행복찾기] 가장 작은 순간의 행복

박광기 대전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승인 2018-06-29 00:00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GettyImages-959647836
게티 이미지 뱅크
이번 주부터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었습니다. 주변에 비를 좋아하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가뭄이 계속되다가 내리는 비는 말 그대로 단비입니다. 이때 내리는 비는 메말랐던 땅을 적셔주고 나무와 농작물에게는 생명의 비이기 때문입니다. 비가 내리는 거리를 연인들끼리 우산을 쓰고 가는 모습이나, 어둠이 내린 저녁 카페에서 향기로운 커피를 마시며 비 내리는 거리를 바라보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로멘틱하고 신비롭기도 해서 드라마나 영화의 한 장면으로 종종 등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는 비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비가 오면 옷이 젖고 축축한 기분이 별로 즐겁지 않습니다. 그러나 맑은 하늘임에도 불구하고 초여름에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를 맞은 어릴 적 기억은 지금도 상쾌함으로 느껴집니다. 흔히 이런 비를 여우비라고 하는데, 그런 여우비의 상쾌함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우비가 내릴 때 약간의 비릿한 냄새가 났지만 땅에서부터 풍겨오던 풋풋함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냄새가 그리 싫지 않았습니다. 그 기억 때문인지 비가 오면 어릴 때 그 여우비를 피해 들어간 처마 밑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을 바라보던 추억이 떠오르곤 합니다.

이제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었습니다. 땀을 많이 흘리고 더위에 약한 나는 여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름에 내리는 장마는 더 좋아하지 않습니다. 비가 더위를 식혀준다고는 하지만, 장마의 축축함과 불편함은 오히려 불쾌함을 주기도 합니다. 여름보다는 겨울이 더 좋고, 겨울보다는 봄이 좋습니다. 그러나 계절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역시 가을입니다. 가을이 왜 좋은지를 말하라고 하면 정말 수많은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가을의 정취와 단풍은 물론이고 맑은 하늘과 공기, 그리고 풍성함 등등 내가 가을을 좋아하는 이유는 정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러나 가을이 좋은 수많은 이유들 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나는 가을 중에서도 초겨울로 넘어가는 시기가 가장 좋습니다. 약간은 쌀쌀함이 느껴져서 외투를 입어야 하는 그런 시기가 정말 좋습니다. 이 시기는 이미 거리와 들판과 산은 가을의 절정을 지나 겨울을 준비하는 때입니다. 나무들은 단풍을 불태우는 절정의 시간을 지나 낙엽을 떨어뜨리고 얼마 남지 않은 마른 잎들을 안간 힘을 다해 붙잡으려고 하고 있고, 들판은 이미 추수를 마치고 뿌리만 남은 볏짚으로 찬란했던 여름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모습이 내게는 아련한 향수를 마구 불러내 주기 때문에 이 시기가 정말 좋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런 모습이 내게는 어떤 위안도 주고 행복함을 주기도 합니다.



흔히 평범한 일상 속에서 무심코 갑자기 나타나는 통찰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아마도 동양철학에서는 '도를 깨우침'을 의미하는 '득도'(得道)라고도 하고, 기독교에서는 '신의 존재가 현세에 드러남'을 의미하는 '에피파니'(epiphany)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자도 아니고 도를 수행하는 수도자도 아니라서 이런 '득도'나 '에피파니'를 경험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고,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의 생활 속에서 순간순간 느끼는 아주 짧은 '순간의 행복함'은 가끔 경험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커피 깡통의 진공 포장을 뜯을 때 나는 신선한 커피향이 내게는 바로 '순간의 행복'입니다. 그리고 늦가을 길을 가다 문득 맡게 되는 낙엽을 때우는 냄새가 내게는 또 다른 '순간의 행복'이고, 발에 밟히는 낙엽의 아스작 거리는 소리는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사실 왜 이런 순간의 것들이 행복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순간의 작은 것들로 행복감을 느끼는 경우를 종종 경험합니다. 일을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바라본 하늘의 붉은 노을 때문에 행복하기도 하고, 자갈밭에 피어난 작고 왜소한 노란 들꽃으로 마음을 위로 받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가 도를 깨우는 것도 아니고. 신의 현존을 경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로 이런 아주 작은 것들로 인해 우리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도 있고, 그것으로 인해서 잊고 있었던 과거의 기억을 되살릴 수도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심오한 도를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렇게 우리에게 작은 행복을 가져다주는 아주 작은 것들이 우리 주변에 참 많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이 너무나도 작기 때문에, 그 작은 것의 가치를 무시하거나 잊고 지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너무 작은 것이기에 무시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님에도 말입니다. 오히려 작기 때문에 더 아름답고, 더 가치가 있는 것이고, 더 소중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이 작다는 이유만으로 무시하고 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 보면 '나'라는 존재도 종교적으로 신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고 인간사의 전체에서 보면 우리가 작은 것이라고 무시하고 망각하고 있는 '아주 작은 존재'와도 같은 것인데 말입니다.

이 의미는 '나의 존재'가 누구에게는 작은 희망도 되고, 작은 행복도 될 수 있고, 또 순간의 행복을 주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말도 됩니다. 마치 우리가 일상에게 순간적으로 느끼는 작은 행복의 단서를 주는 작은 것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나에게 행복을 주는 순간의 작은 것들처럼 나도 누구에게는 순간의 행복을 주는 작은 존재로 인식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작은 순간의 행복들을 찾고 또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마가 시작된 이번 주말 내게 행복을 주는 작은 것들을 주변에서 찾아보아야겠습니다. 그리고 나의 존재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작은 존재가 될 수 있는 지도 고민해 보아야겠습니다. 아마도 이런 것들이 모아지면, 나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작은 순간의 행복들이 모여 더 풍요로운 행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행복한 주말되시길 기원합니다.

대전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박광기 올림

박광기교수115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세종시 50대 공직자 잇따라 실신...연말 과로 추정
  2. [취임 100일 인터뷰] 황창선 대전경찰청장 "대전도 경무관급 서장 필요…신종범죄 강력 대응할 것"
  3. [사설] 아산만 순환철도, ‘베이밸리 메가시티’ 청신호 켜졌다
  4. [사설] 충남대 '글로컬대 도전 전략' 치밀해야
  5. 대전중부서, 자율방범연합대 범죄예방 한마음 전진대회 개최
  1. 현대프리미엄아울렛 대전점, 중부권 최대 규모 크리스마스 연출
  2. 경무관급 경찰서 없는 대전…치안 수요 증가 유성에 지정 필요
  3. 이장우 "임계점 오면 충청기반 정당 창당"
  4. 연명치료 중에도 성장한 '우리 환이'… 영정그림엔 미소
  5. 대전교육청 성천초 통폐합 추진… 학부모 동의 난항 우려

헤드라인 뉴스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지역상권 분석 18. 대전 중구 선화동 버거집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지역상권 분석 18. 대전 중구 선화동 버거집

자영업으로 제2의 인생에 도전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정년퇴직을 앞두거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만의 가게를 차리는 소상공인의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자영업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나 메뉴 등을 주제로 해야 성공한다는 법칙이 있다. 무엇이든 한 가지에 몰두해 질리도록 파악하고 있어야 소비자에게 선택받기 때문이다. 자영업은 포화상태인 레드오션으로 불린다. 그러나 위치와 입지 등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아이템을 선정하면 성공의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에 중도일보는 자영업 시작의 첫 단추를 올바르게 끼울 수 있도록 대전의 주요 상권..

행정통합, 넘어야 할 과제 산적…주민 동의와 정부 지원 이끌어내야
행정통합, 넘어야 할 과제 산적…주민 동의와 정부 지원 이끌어내야

대전과 충남이 21일 행정통합을 위한 첫발은 내딛었지만, 앞으로 넘어야 할 산도 많다는 지적이다. 대전과 충남보다 앞서 행정통합을 위해 움직임을 보인 대구와 경북이 경우 일부 지역에서 반대 목소리가 나오면서 지역 갈등으로 번지고 있는 모양새다. 대전과 충남이 행정통합을 위한 충분한 숙의 기간이 필요해 보이는 대목이다. 대전시와 충남도는 21일 옛 충남도청사에서 대전시와 충남도를 통합한 '통합 지방자치단체'출범 추진을 위한 공동 선언문을 발표했다. 대전시와 충남도는 1989년 대전직할시 승격 이후 35년 동안 분리됐지만, 이번 행정통..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충북은 청주권을 비롯해 각 지역별로 주민 숙원사업이 널려있다. 모두 시·군 예산으로 해결하기에 어려운 현안들이어서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한 사업들이다. 이런 가운데 국토균형발전에 대한 기대가 크다. 윤 정부의 임기 반환점을 돈 상황에서 충북에 어떤 변화가 있을 지도 관심사다. 윤석열 정부의 지난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충북지역 공약은 7대 공약 15대 정책과제 57개 세부과제다. 구체적으로 청주도심 통과 충청권 광역철도 건설, 중부권 동서횡단철도 구축,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구축 등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조..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