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지연 우송대 초빙교수 |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고도 볼 수 있다. 말하는 대로, 생각한다는 입장이다. '민족'이라는 개념이 식민지 조선의 신문에 자주 등장하기 전까지 우리가 서로를 얼마만큼이나 하나의 민족으로 의식했을지 확신할 수 없는 것처럼. 민족이라는 말이 민족성을, 국민이라는 말이 국민국가를 만든다.
'고독'이라는 개념이 고독을 깨닫게 한다. 인간 본연의 고독이란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며 정인을 기다리는 외로움과는 좀 다른 차원의 것이다. 근대 개인의 시공간이 확보되기 전 이야기책조차 전기수 앞에 모여 앉아 '다 함께 읽던' 시절의 사람들에게, 고독을 감각할 겨를이나 있었을까. 고독이라는 말과 함께 고독을 느끼는 내면이 발견된 건 아닐까. 언어가 사고의 프레임을 만든다는 것만은 부정하기 어렵다.
우리는 언어로써 세계를 나누어 이해하곤 한다. 무지개의 색깔은 문화권에 따라 다르다. 무지개의 색깔은 꼭 '빨주노초파남보' 7개로 분절된 것이 아니지만, 언어가 그렇게 보도록 종용한다. 무엇보다 시간에 대한 구분은 확실히 특기할 만한 인간만의 언어체계다. 우주는 공전과 자전을 반복했을 뿐인데, 2017년과 2018년의 경계를 굳이 나누어 부르는 명명 말이다. 언어란 의사소통의 도구이기만 한 게 아니라, 색깔이나 시간 등 경계가 모호한 세계에 이름을 붙여 명확한 인식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는 얘기다.
나아가 인간만이 자신을 인간이라고 부른다. 인간이 인간이라는 추상 또는 상징으로 자신의 종을 호명하는 순간 비로소 인간이 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를 구분하여 인식하는 언어습관 내지 사고방식 덕분에 인간은 '달라진 나, 새로운 나, 더 나아진 나'를 꿈꾼다. 어제, 오늘, 내일을 분절적으로 인식하지 않는 강아지는 더 나은 강아지가 되고자 꿈꾸지 않을 것이다. 선악의 분별이 없는 자연은 타락하지 않는다. 선악의 분별을 만들어낸 인간은 저마다의 권선징악을 내걸고 전쟁을 한다. 물론 인간도 자연이고 우주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느끼지 않을 때가 많다. 길가의 민들레나 장미와 다르게 '생긴 대로' 사는 경지에 쉬이 도달하지 못하고, 자신이 민들레면서 장미이기를 원한다. 어쩌면 이러한 자아상의 균열조차 인간의 '생김새'에 포함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 언어의 상징 사유는 인간을 인간으로 호명하고, 시간을 나누고 추상화하며, 선악의 대립적 인식과 인간만의 욕망과 굴레를 만든다. 그 굴레란 선형적, 순차적, 진보적 시간관이 지닌 어떤 숙명적 한계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인간 언어의 숙명적 한계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다움의 중대한 속성으로 받아들인다. 언어의 굴레와 시간의 속박이 없다고 행복할까. 정말로 개나 고양이가 되는 편이 낫다면, 그건 그것대로 인간성의 포기이고 현실 도피다. 주관과 객관, 자아와 대상, 주체와 타자가 일정하게 나누어져 있는 긴장 상태에서의 대화여야 제대로 된 소통인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타자의 일부가 되려는 노예근성이거나 타인에게 자신을 강요하는 폭압적 합일일 뿐이다. 연인이 내 손가락처럼 나의 예상과 명령대로만 움직인다면, 그 관계에는 긴장과 존중이 사라진다. 비록 갈등할지언정 인간다운 소통이란 분절적 세계 인식이라는 인간 언어의 한계를 전제로 한다.
유발 하라리는 자신의 저작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에서 이를 더욱 적극적으로 긍정해낸다. 인간은 추상적 사유를 통해 의미를 창출하고 그렇게 만들어낸 각종 허구적 기반 위에 산다는 것이다. 수메르 인들이 신을 위한 비즈니스로 운하를 건설하고 여럿 먹여 살렸듯 현대사회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나 저스틴 비버가 그 신의 역할을 대신한다. 국가도 인권도 자본주의도 우리가 스스로 정한 축구게임의 룰 같은 것이란다. 실재 세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동물들은 추상화된 의미보다는 존재하는 객관 세계에서 사고하고 그에 말미암은 감정을 느낀다. 인간과 같은 의미 부여의 상상력을 가지지 못했다. 놀랍게도 그게 바로 호모 사피엔스가 의미와 허구, 관념과 이야기를 통해 그의 주장에 내 표현을 보태자면, 다시 말해 '언어'를 통해 세계를 지배해온 방식이라는 것이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인간은 누구나 남과 같고 싶기도 하고 다르고 싶기도 하다. 양자의 균형이 인생에서 중요하다. 남과 비슷해지고 싶은 욕구, 관계를 통해 남과 영향을 주고받으려는 마음, 가정과 사회를 구성하려는 본능 등은 언어의 소통 기능 및 연결성과 맞닿아 있다. 한편 남과 단절되고 싶은 마음, 남과 다른 나를 증명하고자 하는 주체적 자기인식 내지 커리어 욕구 등은 언어의 명명 기능 및 분절적 속성과 짝을 이룬다. 언어의 본질은 인생의 메커니즘과 이토록 닮았다. 언어 능력이 곧 삶의 능력일 수 있는 이유다. 송지연 우송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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