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성산성 남문지에서 본 성안 모습/사진=조영연 |
세성산성 아랫마을에 공달원(孔達院)이 설치돼 있었다. 과거 삼남으로 통하던 길은 성의 서쪽 소정리를 거쳐 전의 운주산성 아래로 가거나 혹은 세성산성의 바로 우측 수신을 거쳐 조치원으로 내려갔을 것이고 진천, 청주, 경상도 방면 왕래는 현재 21번국도 근처길을 이용했을 것이다. 세성산 북쪽 정상에서는 천안시내 방면과 멀리 위례산(성), 만노산(성)까지도 조망된다. 북쪽 진천방면 길 즉 21번국도와 좌측으로는 경부 방면 교통로가 보인다.
세성산은 불과 해발 200미터 조금 넘는 야산이지만 주변이 워낙 낮은 지대라서 제법 높아 보이며 특히 급경사인 북벽 아래 도로에서 바라보면 상당히 높아 보인다. 성의 남서쪽은 마을까지 비스듬히 낮아진다. 정상 장수바위를 정점으로 하는 좌우 두 줄기가 마치 기슭을 포옹하듯이 감싸 동서벽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마을 근처에 이르러 안으로 굽으면서 남벽을 형성, 계곡을 감싼다. 남벽 중앙부에 약 20m 가량 절단된 부분이 수구와 함께 마을로 통하는 남문지다. 따라서 성의 내부(현지명 성안말)는 북고남저의 삼태기 안처럼 아늑한 원형 마을이다.
산성은 정상부를 중심으로 약 280m 가량 동서 타원형의 내성이 있고, 내성의 우에서 양쪽으로 포옹하듯 내려온 줄기들이 외성의 동서벽을 형성한다. 북벽은 자연스럽게 깎아지른 듯한 암벽이 천연성벽을 이뤘고 산의 8부 정도를 가로지른 내성벽은 붕괴부에서 토석혼축의 모습이 나타난다. 가장 경사가 덜한 서벽에는 거친 자연석 막돌로 석축을 했던 듯한데 그 붕괴석으로 보이는 석재 일부는 황씨묘의 축석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성 내부에서는 지금도 붉은색 기와편과 경질토기 등 토기와 자기편들이 산재해 삼국 이래 조선시대까지 꾸준히 활용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세성선성에 있는 동학군 위령비/사진=조영연 |
남매 장수를 둔 어머니가 축성 경쟁을 벌려 딸을 죽이고 아들을 살렸다는 흔하고 흔한 산성설화는 이곳에도 남았다. 다만 죽은 누이가 흰 용마가 돼 승천했다가 훗날 장수가 된 아들이 나라를 위해 필요한 준마를 모집함에 어떤 말도 오르지 못한 절벽을 뛰어올라 함께 나라를 지키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부분만이 독특하다. 장수와 말의 발자국이 새겨졌다는 전설이 성의 정상 장수바위에 깃들어 있다.
세성산성 내부 모습/사진=조영연 |
천안삼거리에는 수자리 살러 가던 아비가 홀로 남은 외동딸과 헤어지면서 버들가지를 심은 것이 크게 자란 뒤에야 돌아와 상봉했다는 등의 설화도 있으나 아무래도 이런 곳에 어울리는 것은 사랑을 이루지 못한 남녀간의 비극적인 이야기다.
과거 보러 가던 전라도 고부의 한 선비가 주막에서 하룻밤 머물다 깊은 밤 기생 능소의 청아한 가야금 소리에 반해 사랑을 맺었다. 과거에 급제한 뒤 까마득히 잊고 있던 선비를 잊지 못한 능소가 기다림에 지쳐 죽고 그 자리에 자라 버들이 됐다는 애틋하고 비극적인 전설이다.
"천안삼거리 능수버들은 제멋에 겨워서 휘늘어졌구나/ 아이고대고 성화가 났구나.
은하 작교가 무너졌으니 건너갈 길이 막연하구나"
물론 중간중간 조흥구들로 구성지게 간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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