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새롬의 세상만사] 집으로 가는 길

  • 오피니언
  • 기자수첩

[박새롬의 세상만사] 집으로 가는 길

  • 승인 2018-05-29 11:02
  • 신문게재 2018-05-30 21면
  • 박새롬 기자박새롬 기자
#1. '이제 시체들이 두렵지 않았다. 나는 경멸하는 마음으로 시체들을 발로 차서 뒤집었다. G3(소총)와 탄약, 권총을 찾았다.'

아프리카 시에라이온의 소년 이스마엘은 마리화나를 피워 편두통을 가라앉히고, 화약과 코카인을 섞은 '브라운-브라운'을 흡입하며 초소를 지켰다. 자전적 에세이 '집으로 가는 길'의 주인공 이스마엘은 정부 반군의 소년병이었다. 마을을 습격하고 학살을 저지르는 지금이 아무렇지 않은 이스마엘이지만, 얼마 전까지는 무엇인지도 모를 해방운동 때문에 왜 어린아이들에게 총을 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하며 울었다. 그보다 조금 더 전에는 그저 장기자랑에 참여하려고 친구들과 길을 떠나는 중이었다. 그날 느닷없이 총알이 빗발치듯 날아왔다. 살기 위해 무작정 달려야 했던 그는 집으로 가는 길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2. 영화 '그을린 사랑'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집안에서 허락하지 않는 난민과 사랑에 빠져 아기를 갖게 된다. 연인이 명예살인을 당한 뒤, 어머니는 살기 위해 아들을 낳자마자 고아원에 맡기고 집을 떠나야 했다. 반드시 아들을 찾아가겠다고 다짐했지만 몇 년 후 내전으로 고아원이 파괴되고, 어머니는 그의 생사를 알 수 없게 된다.

니하드
영화 '그을린 사랑'은 Radiohead의 곡 'You and whose army?'로 시작한다.곡의 가사에는 이라크 파병을 허락한 토니 블레어 전 영국총리를 향한 비난과 반전의 메시지가 담겼다.  유튜브 캡처
영화를 보는 관객은 그의 아들로 보이는 소년을 화면에서 만난다. 총을 든 남자들이 보초를 선 방 안에서 삭발을 당했고, 폐허가 된 거리를 달려가는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조준해 쓰러트린다. 극 중 다른 인물의 말에 따르면 소년은 엄마를 찾아 헤매다 돌아온 뒤, 엄마가 어디서든 자신의 사진을 볼 수 있도록 '순교자'가 되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3. 남을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스마엘은 유니세프에 구조되고 소년병 재활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다.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사람들 곁에서 트라우마를 치료한다. 지금은 자신과 같은 소년병의 비극이 없도록 증언을 담은 책을 쓰고 유니세프 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그을린 사랑' 속 소년은 어른이 되어 스스로 다른 나라로 떠나기 전까지 전쟁의 광기에 매몰된 사람들 외에는 누구도 만나지 못했다.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이 끔찍한 영화 속 비극에 대해, 소년의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은 건 그 때문이다.

지구 위 어딘가에서 여전히 총성이 울린다. 난민들은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살 곳을 찾아 떠난다. 누군가 아이들에게 책 대신 총을 쥐어 주고 글 대신 적을 가르치고 있을 것이다.

실화 속 이스마엘과 영화 속 소년이 다른 길을 걷게 된 건 누군가 그들을 멈출 수 있게 도와주었는가의 차이다. 이스마엘의 책을 읽고 국제구호기구를 통한 해외 아동 후원을 시작한 지 10년이 됐다. 후원하는 아이들이 소년병이 아닌 소년으로 자라 이스마엘처럼 누군가를 움직이게 하고, 그 누군가가 영화 속 니하드 같은 소년을 집에 갈 수 있게 하길 바란다. 그렇게 세상의 총소리가 멈췄으면 좋겠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유성 둔곡 A4블록 공공주택 연말 첫삽 뜨나
  2. 12월부터 5인승 이상 자동차 소화기 설치 의무화
  3. [기고] 공무원의 첫발 100일, 조직문화 속에서 배우고 성장하며
  4. ‘우크라이나에 군사지원·전쟁개입 하지 말라’
  5. JMS 정명석 성범죄 피해자들 손해배상 민사소송 시작
  1. 대전보건대, 대학연합 뉴트로 스포츠 경진·비만해결 풋살대회 성료
  2. 대전 유통업계, 크리스마스 대목 잡아라... 트리와 대대적 마케팅으로 분주
  3. 한국자유총연맹 산내동위원회, '사랑의 반찬 나눔' 온정 전해
  4. 구본길에 박상원까지! 파리 펜싱 영웅들 다모였다! 대전서 열린 전국 펜싱대회
  5. 대전시, 여의도에 배수진... 국비확보 총력

헤드라인 뉴스


"뜨끈한 한 끼에 마음도 녹아"… 함께 온기 나누는 사람들

"뜨끈한 한 끼에 마음도 녹아"… 함께 온기 나누는 사람들

27일 낮 12시께 눈발까지 흩날리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대전 중구 한 교회의 식당은 뜨끈한 된장국에 훈훈한 공기가 감돌았다. 식당 안에서는 대전자원봉사연합회 소속 자원봉사자들이 부지런히 음식을 나르며 어르신들을 대접하고 있었다. 150여 명의 어르신이 빼곡히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기다렸다. 얇은 패딩과 목도리 차림인 어르신들은 강한 바람을 뚫고 이곳까지 왔다고 한다. "밥도 같이 먹어야 맛있지." 한 어르신이 식당에 들어서자 자원봉사자가 빈자리로 안내했다. 이곳에 오는 대부분은 75세 이상의 독거 노인이다. 매일 혼..

"홈 승리하고 1부 간다"… 충남아산FC 28일 승강전 홈경기
"홈 승리하고 1부 간다"… 충남아산FC 28일 승강전 홈경기

창단 후 첫 K리그1 승격에 도전하는 충남아산FC가 승강전 홈경기를 앞두고 관심이 뜨거워 지고 있다. 충남아산FC는 28일 대구FC와 승강전 첫 경기를 천안종합운동장에서 홈 경기로 치른다. 홈 경기장인 아산 이순신종합운동장 잔디 교체 공사로 인해 임시 경기장으로 천안에서 경기를 하게 됐다. 승강전은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28일 홈 경기 사흘 후인 12월 1일 대구로 이동해 어웨이 경기를 치른다. 승리수·합산 득실차 순으로 최종 승격팀을 정하게 되며 원정 다득점 규정은 적용하지 않아 1·2차전 결과에 따라 연장전 또는 승부차기까지..

충청권 4개시도 "2027 하계U대회 반드시 성공"… 제2차 위원총회
충청권 4개시도 "2027 하계U대회 반드시 성공"… 제2차 위원총회

충청권 4개 시도가 2027년 열리는 하걔세계대학경기대회 성공 개최를 재차 다짐했다. 2027 충청권 하계세계대학경기대회 조직위원회(위원장 강창희, 이하 조직위)는 27일 대전 호텔 ICC 크리스탈볼룸에서 2024년 제2차 위원총회를 개최했다. 이날 총회는 지난 3월 강 위원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취임한 이후 처음 개최된 것이다. 행사에는 대전시 세종시 충남도 충북도 등 충청권 4개 시도 부지사와 대한체육회 부회장, 대한대학스포츠위원회 위원장, 시도 체육회장, 시도의회 의장 등이 참석했다. 강 위원장과 조직위원회 위원이 공식적으로 첫..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거리 나설 준비 마친 구세군 자선냄비 거리 나설 준비 마친 구세군 자선냄비

  • 12월부터 5인승 이상 자동차 소화기 설치 의무화 12월부터 5인승 이상 자동차 소화기 설치 의무화

  • 첫 눈 맞으며 출근 첫 눈 맞으며 출근

  • 가을의 끝자락 ‘낙엽쌓인 도심’ 가을의 끝자락 ‘낙엽쌓인 도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