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지연 우송대 초빙교수 |
진보의 최전선은 가해자 의식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해자 의식"은 아래에 인용해둔 이청준의 소설 <가해자의 얼굴>에 나오는 말이다. 이는 통일에 대한 아버지와 딸의 두 입장을 보여주는 소설인데, 진정한 통일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작가의 페르소나가 들고 나오는 키워드가 바로 가해자 의식이다.
"한동안 세월이 흐르다보니, 처음에 피해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간에 피해자로서의 과도한 자위권과 반격권을 누림으로 하여 어느덧 새 가해자의 딱지를 얻게 되고, 이들 앞에 가해자로 억압을 받아온 사람들은 그간의 수난과 자기 회복의 갈망 속에 목소리가 서서히 드높아가면서 새로운 수난자로서의 요구를 내세우고 나서는 형편이었다. 수난자 의식은 그런 식으로 일정한 시간대를 거치면서 항상 새 가해자로 변신해가는 과정을 좇게 되고 그 수난자와 가해자의 자리를 번갈아가면서 복수와 보상, 억압과 수난의 악순환을 되풀이하게 되더란 말이다. 하지만 가해자 의식은 다른 가해자를 용납하지도 않으려니와 더욱이 새로운 수난자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이와 같이 가해자 의식은 가해자를 변명해주기 위한 용어가 아니다. 다만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책임 의식 정도로 바꾸어 써도 의미는 통한다.
이청준의 소설은 늘 사려 깊다. 소설 <당신들의 천국>을 박정희 정권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는 건 거의 교과서적인 독법에 속한다. 소록도 나환자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선의와 열정으로 내달리는 조 원장이 박정희를 연상시킨다는 건 새롭지 않은 해석이다. 혹시 그가 "동상 세우기"에 골몰하지 않을까 끊임없이 의심하고 감시하는 보건과장 이상욱 역시 스테레오 타입의 비판적 지식인을 상기시킨다. 그의 말대로 큰 동상은 큰 그림자를 드리운다. 무거운 명분으로 지어진 권력은 우상 숭배를 낳을 것이라는 이상욱 과장의 지적과 우려는 그래서 합당하다.
1970년대 소설인 <당신들의 천국>에서 지적된 동상의 자릿값이 변화했다는 것을 1990년대 소설 <가해자의 얼굴>에서 은근하게 짚어내고 있다는 데에서 작가의 사려 깊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제물로서의 가해자"라는 표현까지 쓴다. "자신 속의 다른 무엇으로부터 눈을 돌리기 위해 부러 그 피해의식을 더 과장해오고 있었"을 누군가들의 심리마저 간파한다.
사회정치적 전환기를 지나면서 동상의 그림자는 당시 천국을 건설하려 했던 한 지도자보다는 거꾸로 그에 대한 저항에 드리워졌다고 하면 지나친 진단일까. '우리들만의 지옥', 아니 '세상이 전부 지옥이라는 관념을 팔아 만든 우리들만의 정의로운 천국'.
'진보'라는 가치 개념을 선점한 부류가 민주주의라는 반박불능의 거대한 우상을 독차지했다. 물론 이때의 민주화에 미묘하게 갈라지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는 진실은 가려져 있다. 민주 대 반민주 프레임만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편협한 시각이 오늘날 헤게모니 강자가 되었으나, 그들은 영원히 자신이 반공 프레임에 당해온 약자라고 착각하거나 피해자임을 표방하여 도덕적 정당성을 획득한다.
나를 비롯한 젊은 세대에게 이런 역사관은 거의 진리에 가까운 것으로 교육되었다. 올바른 사유의 디폴트값, 관성적 세계관이 되어버렸다. 약자 또는 피해자라는 정체성이 곧 정치적 정당성과 도덕적 우월성을 증명하는 것이 되다 보니 젊은 세대는 남녀, 너나 할 것 없이 온갖 영역에서 그 태도를 내면화하거나 발화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약자라거나, 피해자라거나, 자신에게 아무런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회일수록 실은 훨씬 끔찍하고 비도덕적인 사회가 될 확률이 높다. 이러한 생각은 공동체를 함께 구성하는 시민이자 성인으로서 가져야 할 개인의 책임과 몫을 잊게 하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분명한 신고가 들어왔으나 '사이렌 울리면 민원 들어오겠지' 내지는 '부부싸움 하는 것 같은데 끼어들면 욕만 먹겠지' 하는 피해자 의식 기반의 생각으로 굼뜨게 움직인 경찰이 처참한 살인 사건을 방관하게 된 일이 있었다.
내가 그 자리에 노곤한 경찰 당직자로 앉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모두가 그런 유약한 방어심으로 살아가며 문제 상황을 무마하고 있으니 참사가 터지는 건 아닐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내게 타인을 구할 실질적 힘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자신이 자칫 방관자적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대한 민감성을 지닌 사람은 결국 무거운 몸을 일으킬 것이다. 가해자의 얼굴로 피해자를 막아내는 윤리가 여기 있다. 송지연 우송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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