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 교수 |
그러나 인류 역사는 대부분의 평화협정이 휴짓조각이나 다름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평화협정을 악용한 측에 의해 전쟁이 재발되고 순진하게 평화협정을 그대로 믿은 측은 패망하거나 크게 어려움을 당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빅토르 세르뷜리에는 BC 1500년부터 1860년까지 체결된 약 8천 건의 평화조약들을 조사했는데, 평균 2년을 지속하지 못하고 전쟁재발로 이어졌다고 한다. 20세기에 체결된 평화협정인 베르사유강화조약, 뮌헨협정, 파리·베트남 평화협정, 중동평화협정 또한 같은 운명이었다.
파리·베트남 평화협정은 분단국가에서의 평화협정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 평화협정의 전말은 이렇다. 1973년 1월 27일 베트남전쟁의 교전 당사국인 미국과 남베트남, 북베트남과 베트남 임시혁명정부인 베트콩이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협상을 주도했던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과 북베트남 정치국원 레둑토는 그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되기도 했다. 키신저는 평화협정을 담보하기 위해 파괴된 북베트남의 경제를 재건하는 명목으로 북베트남에 미국이 직접 원조하는 20억 달러와 IBRD가 지원하는 차관 20억 달러, 총 40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하도록 했다.
더 확실한 평화보장을 위해 휴전감시위원단인 캐나다, 헝가리, 폴란드, 이란 4개국이 협정에 참여하게 했다. 북베트남의 하반라우 외무차관은 150명의 고문단과 함께 일종의 인질 형식으로 사이공에 체류토록 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까지도 믿을 수 없었던 키신저는 영국과 프랑스, 소련, 중국 4개국 외무장관까지 평화협정 서명에 동참시켰다.
평화협정과 함께 키신저는 남베트남과도 따로 방위조약을 체결했다. 미군이 철수한 후 북베트남이나 베트콩이 평화협정을 파기하면, 즉각 해·공군력을 투입해 북베트남을 폭격하고 남베트남 지상군을 지원하기로 굳게 약속했다.
전쟁 대신 평화가 올 것이라는 평화협정 서명의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전쟁은 재발되고 급기야 평화협정 체결 2년이 갓 지난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이 북베트남과 베트콩 연합군에 의해 함락돼 베트남은 완전히 공산화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평화협정으로 초래된 공산화로 6백여만 명이 처형되거나 재교육 캠프에서 목숨을 잃었고 1백만 이상의 보트 피플이 망망대해를 떠돌다가 10만 이상은 죽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타국에서 살아가야 하는 참혹한 삶이 계속됐다.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전쟁 대신 평화가 올 것으로 생각한 미국과 남베트남은 평화협정을 악용한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좋은 먹이가 됐다. 당시 북베트남은 미군의 경제봉쇄와 폭격으로 심한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해 전쟁 수행 능력까지도 상실할 지경에 이르게 됐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북베트남은 적극적으로 평화회담에 나섰던 것이다. 평화회담은 북베트남의 전략이었고, 전술만 바꾼 기만술책이었다.
베트남과 우리나라는 여러모로 유사한 점이 많다. 20세기 남에는 자유민주주의체제가, 북에는 공산주의체제가 들어섰다. 분단으로 인해 전쟁이 발발하고 미국이 남쪽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했고, 중국과 소련은 북쪽을 지원했다.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것과 현재 휴전상태로 종전을 선언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고자 하는 것까지도 너무나 닮았다. 파리·베트남 평화조약은 평화협정이 논의되고 있는 우리나라가 평화조약 체결로 인해 멸망한 월남과 같은 운명에 처하지 않으려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입각한 미군 주둔은 지속돼야 한다.
월남 내부를 뒤흔든 베트콩과 같은 공산주의 사상에 아직도 도취한 사람들의 책동을 막을 수 있도록 안보에는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하나가 되어야 함을 교훈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할 때 한반도에는 평화와 번영이 찾아오고 종국에는 자유민주주의 평화통일이 이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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