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산계리 토성 전경/사진=조영연 |
성의 동과 남쪽 부분은 報靑川이 해자를 이루며 강변 낭떠러지가 동벽과 남벽을 이룬다. 서쪽과 북쪽은 낮아지며 마을 방면으로 연결된다. 대체적으로 東高西低의 형태를 이루며 서벽 아래로는 민가와 들이 보청천까지 이어진다. 북쪽으로는 건너편 저점산 기슭과 사이 골짜기에 청성면 소재지가 위치하여 민가들과 면사무소 등이 들어섰고 505 지방도로가 통과한다.
만여 평의 평지가 분지(고로형)처럼 오목하게 형성된 산계리토성 안에는 과거 성안부락에 우물과 대여섯 채의 민가가 현존했다. 그 부분을 제외하고 그 주변은 거의 꼭대기까지 경작지로 변했으며 땅 주인들인 성주 전씨(星州全氏)들의 민묘가 많이 산재해 성으로서의 유지는 찾을 길 없을 뿐더러 성벽도 거의 붕괴된 상태였다. 북문지 안 민묘 부근 평탄지가 일제가 신사를 세우려다 해방으로 실행치 못한 터라고 촌로는 전한다. 성벽은 분지 주변 천연적인 둔덕 위에 지세를 따라 바닥을 석축으로 단단히 다진 뒤 다져쌓기로 토축했다. 2003 지표조사 결과 석축 위에 진흙과 마사토를 다져 올린 판축 토성임과 동쪽 무너진 부분에서 일부 석축한 흔적이, 동,서, 남 모서리마다 설치했던 치성들은 거의 원형을 잃은 상태임이 드러났다.
성의 규모는 둘레 약 1.5km(지표조사는 1.1km)의 비교적 큰 성으로, 붕괴가 심한 가운데서도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한 북동과 북서쪽은 폭 2m, 높이 5, 6m 정도로 능선의 바위와 바위를 이어가며 주변을 둘러싸 튼튼히 함으로써 성안은 분지 형태를 이룬다. 동쪽과 남쪽은 강변으로 경사가 심한 낭떠러지여서 근접하기 어려운 상태다.
험한 동벽에는 바위 밑에 밖에서 적이 들어오기 극히 어렵게 성문을 설치했다. 동북쪽 최정상에 장대지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고문헌 상에는 성내에 창고가 있었다고 기록됐다. 그것은 이 성이 현의 치소 성 관계였음을 암시해 준다. 서문지는 현재 통행로가 되어 성안마을에서 성밖 마을로 내려가는 V자 형의 골짜기에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창고가 있었다는 성안은 상당히 넓고 삼태기 안처럼 아늑하여 다수의 건물이나 시설들을 갖춰 군사나 치소 관련 임무를 충분히 소화해 낼 수 있음 직하다.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분지 안에 의외로 넓은 평야지대가 있어 군량 확보 등의 유리한 점도 지니고 있다.
토성 인근에는 삼국 시대 군사적 사실(史實)과 관련된 지명들이 여럿 있다. 서남쪽 보청천 건너 1km 지경에 弓村里 즉 예전에 활을 만든 곳이어서 우리말로는 활골이라 부르는 곳이 있다. 활골에서 약 3km밖 남쪽에는 '장군재'는 김유신과 무열왕이 백제 공략을 위해 출군할 때 삼년산성에서 하루를 묶고, 굴산성에서 하루를 야숙한 다음 유신은 사비로, 무열왕은 금돌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작별한 고개, 동쪽 성벽 아래 19번 국도상에 '護軍재'도 있다. 또 이 토성의 북벽 아래 청성면 소재지 건너 1km 지점에 저점산(313m) 석성이 있어 낮은 지대에 있는 이 치소성을 군사적 방어성으로 보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것들로 보아 이곳이 신라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지역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지리상으로 볼 때도 청산은 삼년산성이나 금돌성과 불과 오륙십 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하룻길이며, 옥천 관산성 방면, 심천-영동-양산 대왕성(助川城?)-금산 진동산성 방면으로 큰 장애 없이 사비에 도달할 수 있는 길목에 이 산계리토성이 위치했다. .
이 산계리 토성을 굴산성(屈山城)으로 비정하는 것은 여러 자료들에서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각도읍지목록 등의 자료를 통해서 볼 때 현재의 청성면이 과거의 청산현이었고, 그 현소가 여기에 있으며 청산현이 경덕왕 16년(757) 이전까지 上州府 屈山縣이었기 때문이다. 굴산성의 초축 기록은 없으나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8년 정월에 이찬 實竹을 장군으로 삼아 一善(현 善山) 지방의 장정 3천을 징발하여 삼년산성과 굴산성을 개축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을 뿐이다.
조영연 / '시간따라 길따라 다시 밟는 산성과 백제 뒷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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