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재 윤증은 조선후기의 학자다. 충청오현으로 불리는 윤선거의 아들이자, 소론의 영수였다. |
사후 304년, 그가 쓰고 후손들이 간직해온 기록물은 조선 재야의 학자로만 기억되던 그를 새롭게 재조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있다.
3월 29일부터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는 한국서예사특별전 34번째 순서로 명재 윤증 전을 진행 중이다.
남겨진 초상 5점 가운데 2점을 전시했고, 서예 기록물은 '신유의서'를 비롯해 약 60점을 만날 수 있다.
윤증은 학문과 성품, 서체, 가문 등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었던 '충청의 인물'이었다.
충청오현 중 한 사람인 윤선거의 아들이자 소론의 영수였고, 80여 년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지만 백의정승이라 불렸다. 조선 19대 왕 숙종은 윤증에게 우의정 벼슬을, 정조 때는 3대에 걸쳐 시호를 내릴 만큼 왕들도 그의 존재를 늘 주시했다.
명재 윤증이 쓴 8폭짜리 초서체 병풍. |
큰아버지 윤순거,윤문거, 아버지 윤선거 그리고 윤증의 글씨를 모아 한권으로 엮은 필첩이다. 조선시대 필첩 가운데 가장 많은 발문이 담겨있다. |
이번 전시회가 서예전이 된 이유도 파평 윤 씨 가문이 남긴 명작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갈하게 또박또박 쓴 흔치 않은 행서와, 예술적 가치가 높은 초서체까지 명재 윤증의 글씨를 본 서예전문가들이 "우리나라 서예사를 수정해야 할 만큼 가치가 있다"고 평가할 정도다.
명재사상연구소 이사장이자 전시회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는 윤여갑 선생은 "큰아버지였던 윤순거는 초서체의 대가다. 윤증의 호를 지어줄 만큼 가까웠고 글씨도 큰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실제 큰아버지 윤순거와 윤증의 초서체는 힘이 있는 필력이 느껴지는 공통점이 있었다.
윤증은 매우 꼼꼼하고 치밀한 사람으로 분석된다. 약 1m가 넘는 신유의서 초고본을 살펴보면 수정해야 할 단어와 문장을 세밀하게 표시해뒀다. 또 초고본인 만큼 제자들이 보낸 간찰(편지) 뒷면을 이용했음을 엿볼 수 있다.
신유의서는 노론과 소론이 분당하게 된 결정적인 사유가 됐다. 신유의서는 약 1m 길이의 분량이다. |
송시열이 남인이었던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이자 이를 비판하기 위해 쓴 글이다. 신유의서를 송시열에게 보내지 않았으나 3년 후 송시열의 손자가 그 내용을 베껴 전달하며 관계가 악화 됐다. 결국 이 계기로 서인이었던 두 사람이 소론과 노론으로 분당됐고 사람들은 '니회시비' 혹은 '회니시비'로 기록하고 있다.
윤증은 치열한 정쟁의 시대를 겪으면서도 화합과 평화를 추구했다. 남인과 소론은 색이 다를 뿐이라며 배척하지 않았고, 결국 모두 나라를 위해서 일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후대에 윤증의 제자들 가운데 다양한 실학자들이 나온 것도 스승 명재의 화합 사상과 포용 정신을 배웠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전시회에서 만난 대전 서일여고 졸업생 구슬아(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씨는 "전시 목적이 정치사적과 예학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윤증 상을 확대할 수 있는 전시회고, 개인 가문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들이 대부분이라 가치도 크다 생각한다"고 말했다.
예술의 전당 서예부 김학명 학예사는 "윤증전을 준비하면서 우리 역사에서 재조명돼야 할 인물이 참 많다고 느꼈다. 이번 전시회는 글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윤증과 윤증 가문의 글씨와 옛날 붓의 느낌을 미학, 시각, 예술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윤여갑 명재사상연구소 이사장과 윤석구 전 우리은행 대전충청남부영업본부장을 명재 윤증전에서 만났다. |
윤광안의 7대손인 윤석구 전 우리은행 대전충청남부영업본부장(현 성북동대문영업본부장)은 "7대조 할아버지는 명재 윤증 할아버지의 학문을 그대로 물려 받았다. 반호 할아버지의 글을 모은 ‘지헌부군유고’는 현재 충남대학교에서 번안 작업 중에 있다"고 전했다.
명재 윤증전은 오는 13일까지 계속된다.
이해미 기자 ham7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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