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서산성 전경/사진=조영연 |
성의 남서쪽 건너편 500m 쯤에 삼성산성이 있고 그 뒤로 용봉, 동평, 마성산성 등이 낙타봉처럼 늘어선 산맥이 남쪽으로 멀리 서대산까지 이어진다. 삼성산성 서편 기슭, 금산 방면 37번국도 옆으로는 성왕의 비극적인 죽음을 가져왔다는 전설 속의 구진베루(成田川)를 거쳐 동진하는 서화천(西華川)이 삼성산 우측과 서산성 서벽 앞으로 돌아 북쪽으로 들어가 금강 상류와 합류한다. 근처에 과거 율봉도상의 가화(嘉和)역이 있었다. 국도4호선과 성의 서쪽 끝자락은 이름 자체만으로도 이 주변에서 역사가 어떻게 전개됐는지 짐작케 하는 군전리, 진터벌 들판이 고리산성과 숯고개 옆 노고성 아래까지 이어진다. 북쪽 건너편 수 킬로미터 지점에 이백리성을 포함한 고리산성 6개 보루가 한꺼번에 눈 안에 들어온다. 동쪽으로는 경부고속도로와 보은 방면 국도가, 남으로는 영동 방면으로 향하는 국도 4호선과 경부선 철도가 삼성산성과 사이를 한꺼번에 통과한다. 공교롭게도 이렇게 여러 방향으로 향하는 중요 도로들은 모두 삼성산성과 서산성간 사이를 거쳐야 하므로 서산성은 삼성산성과 더불어 국토 중심부 모든 교통로의 목을 쥐고 있는 관문인 셈이다. 따라서 이 성은 비록 표고 190여 미터 높이에 둘레 800여 미터 전후의 규모에 비해 그 중요성은 대단히 큼을 쉽게 알 수 있다. 남벽 밑 도로 건너의 삼양리토성이 발아래 굽어보인다.
위치로 미뤄 서산성은 고대사에서, 백제와 신라가 각각 이 성을 점령했을 때마다 어느 나라건 군사적 요충지로 삼았을 것이라는 추측은 무리가 없을 듯하다. 특히 서벽은 주변의 모든 교통로와 성들이 모두 조망되는 좋은 위치다.
옥천 서산성 일대 교통로/사진=조영연 |
성의 형태는 동서 양편 봉우리에서 각각 북측으로 약 300m 정도 능선을 내려와 밑변 양 끝에서 계곡을 가로질러 만나 삼각형을 이룬다. 가장 긴 남벽 중간 안부 지점에 삼양리 마을에서 올라오는 남문이 있고 그곳을 통해 능선 너머 서쪽 계곡 아래 옥각리로 내려가는데 이곳이 서문으로 여겨진다. 성벽은 지형을 따라 남쪽은 칠팔십도 가량 보기보다 가파른 경사를 이루었고, 북서의 성벽은 낮아 동남고서북저 형태다. 동쪽 최고봉과 서쪽 끝봉우리 중간 남문지가 있는 부분은 잘록 들어가서 마치 말등 형태다. 남문지 너머 북쪽으로 전개되는 비스듬하고 아늑한 계곡 속의 평탄지는 건물터로 추정된다. 그 아래로 잡목과 수풀이 우거진 곳은 배수구, 연못과 문지가 있었던 곳으로 여겨진다. 시설은 모두 무너져 확실하지 않으나 凹자형의 남문지, 북문지와 성 안 평탄지 곳곳에는 건물터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동쪽 끝 가장 높은 곳은 장대지(將臺址)로 하고 남에서 서로 회절되는 부분에는 삼성산과 사이 도로를 감시하는 초소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과거 성 내에서 백제 토기와 기와 조각들이 많이 발견됐고, 옥각리 일대에는 백제 고분군들이 많이 산재해 있어 서산성을 백제계 성으로 추정한다. 대개 산성 부근에 배치된 고분군은 그 산성과 관련된 인물들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본다. 고기록들에는 성 안에 대여섯 개의 큰 건물터가 있어 병영(兵營)이나 군창지(軍倉址)로 사용됐을 것으로 기록됐다.
혹 세종실록지리지에 성황당이 있는 在郡西四里에 우물과 군창(軍倉)을 갖춘 성이 있다는 기록으로 본다면 다른 기록의 5리에 있는 것은 삼성산성이고, 4리에 있는 이 서산성이 성황당산성일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성왕은 이 성에 들어와 있던 아들을 보러 구진베루쪽으로 오다가 해를 입은 것이 아닐까?
조영연 / '시간따라 길따라 다시 밟는 산성과 백제 뒷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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