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진베루/사진=조영연 |
구진베루의 '狗川'은 고유어 '궂은(厄)내'의 발음상 유사 한자 표기인 바, 구진베루는 '궂은(구진:액=厄)+베루(고대 국어 '별=벼랑, 물가의 낭떠러지崖)간 합성어로 좋지 못한 일이 전개됐던 전설의 현장으로 전자의 설에 무게를 둔다(신라?백제 격전지 관산성 지표조사보고서.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2003). 필자는 내용면에서는 그 견해에 동조하면서 한자 '구(狗)'의 발음과 갈음될 가능성이 있는 고유어 '개'의 발음 속에 '내(川)'가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살펴보고 싶다. 우리말에서 내(川)를 개울이라 한다. 개울은 갯골(갯굴, 갱골)에서 ㄱ탈락형으로 볼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갯골'이란 이름이 곳곳에 있는 것으로 보아 '내(川=개울)가 있는 골짜기'라는 의미인 보통명사로 '갯골(실제 발음은 개꼴)'이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이 경우도 구진베루 전설과도 연결된다.
실제로 현지를 답사해 보면 구진베루는 양편 바위산들 사이에 구불구불하고 큰 S자형 시내가 있으며 무중동과 삼성산(관산)간에 위치한 구릉지대와 개울 등 매복의 조건을 충분히 갖춰져 현재도 그 가까이에 외부에 전혀 노출되지 않는 군부대가 숲속에 감춰져 있다. 성왕의 죽음을 불러온 것은 산, 골짜기, 시내 등이 있는 험지에서의 매복이 거의 확실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왕이 왜 하필 구진베루를 통과하려했는지 의문시된다. 그것은 성왕이 무중동이나 군서 성치산성은 다수의 군사 주둔지를 배경으로 왕이 대기하기에 충분한 곳이었기에 거기서 구진베루를 건너 구타모리새로 가고자 한 것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 19권 흠명기(欽明記) 15년 조에는 이때의 일을 일찍이 신라의 땅에 깊숙이 들어가 구타모라새(久陀牟羅塞)를 쌓고 오랜 동안 고생을 하고 있는 아들 여창(餘昌)을 만나 위로해 주러 보기 오십(步騎五十. '五千'의 오기?)을 이끌고 인근 백제 진영으로부터 출발했다가 도도(都刀)의 복병에 걸려 죽음을 맞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 두 장소의 거리가 1,2km 정도로 아주 가깝고 낮은 구릉지대여서 주둔지로부터 소규모의 병사만 대동하고 비교적 안심하고 갔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들이 있는 곳과 무중동 사이는 이미 점령지였기에 안도감에 젖어 방심하고 병사 50명만 대동한 것이다. 그렇게 근접한 거리임에도 구진베루에는 의외로 상당히 은폐할 장소가 있다. 노고성·무중동에서 출발한 성왕 일행이 멀지 않은 관산성(혹은 서산성) 인근 구타모라새를 향해 안심하고 구진베루 개울 근처를 지나가다가 지리를 잘 파악한 적(간자)에게 매복을 당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삼성산 전경/사진=조영연 |
그래서 실제로 몇 사람의 일본인들에게 발음시켜 본 결과 비슷했으며 역으로 우리나라 '굿터(당)??' 발음과 일본인들의 청취 정도를 질문해 보아도 久陀牟羅의 일본식 발음과 유사하다는 반응이었다. 따라서 '굿터(당)마을의 성 즉 성황당 있는 성'이라는 이름을 찾아낼 수 있다. 이것을 현재 재건산(삼성산)과 서산성 사이에 위치한 성을 성황당 산성이라는 명칭과 일치시킨다면 구타모라새는 삼성산 혹은 서산성이고, 삼성산성은 공격대상인 관산성이라고 할 수 있게 되어 구진베루설과도 들어맞는다. 성황당은 삼성산 내 혹은 삼성산과 서산성 사이 고개에 있었을 것이다. 성황당은 세종실록지리지의 '在郡西四里 혹은 五里인 두 성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성황당산성이 서산성이냐 혹은 성황당석성이냐 혼동하는 것도 두 성 사이 고개에 있던 성황당을 어느쪽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근처의 성을 차지하여 지키고 있던 아들을 만나기 위해 서쪽 어느 지점(무중동?노고산성이든지)을 출발해서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안심하고 보기 50명만으로 성에 가려다 매복에 걸렸다는 이야기도 꾸며 볼 수 있다. 무중동에서 삼성산성 사이는 불과 1km 정도에 불과하며 무중동은 백제군 주둔 전설이 있다.
조영연 / '시간따라 길따라 다시 밟는 산성과 백제 뒷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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