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지연 우송대 초빙교수 |
철학자의 오만에는 위와 같은 이유가 있다. 반대로 그들의 겸손은 타인의 인간됨을 존중하는 데에서 오는 것이고, 그들의 성찰은 소우주로서 자신이 늘 최후의 텍스트이자 데이터 보고임을 믿기에 가능한 것이다. 도덕교과서나 자기계발서 풍의 사회생활용 미덕으로서의 겸손과는 그 성격이 좀 다르다.
재능있는 인문학자가 가설을 설정하거나 첫발상하는 자리는 의외로 텍스트 바깥에 있을 수 있다. 세상 돌아가는 것에서도 연구거리를 얻겠으나, 특히 자기 내면에 가장 재료가 풍부하다. 학문의 형식을 갖추기 위해 그 의미를 텍스트에서 되찾아 확인해줘야 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사정이 이런 만큼,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의 제1원칙은 "무자기(毋自欺)"이다. 자신에게 정직한 태도. 제 뜻과 앎에 대해 메타적으로 치열한 예민함. 자기를 속이지만 않는다면 텍스트적 논거와 적절히 조응된, 작고도 큰 진리 한 조각을 무의미의 세계에 의미로 덧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실리, 물질, 실천, 데이터 등에 대해 '오로지 말로만' 강조하며 기존의 지식인을 손쉽게 조롱하는 [난 달라 지식인] 부류가 의심스럽다. 융복합의 시대라지만 문학은 알레고리로, 철학은 사변으로 완성된다. 인문학의 절대적 무기라 할 수 있는 언어와 인식, 텍스트와 관념을 함부로 폄하하는 것은 매우 부정직하게 보인다. 이미 그것을 사용하고 있으면서 말이다.
특정 개념을 탐구없이 공격하고, 대중이 좋아할 만한 어떤 언어들은 근거없이 찬양한다. 자신의 거짓됨은 바로 보지 않은 채 남을 선동하려고만 드는 태도는 "나는 다른 중보다 현실밀착적으로 도통하여 섹스도 하고 고기도 먹는다!"고 과시하는 자유분방 땡중 코스프레로 이어진다.
그저 담론일 때 유의미하게 작동하여 체제를 자극하고 견제할 수 있었던 사상을, 메스로 잡아들고서는 현실에 곧장 집도한 결과는 잘 알려져 있다. 사회주의 사상이 걸어간 길이 바로 원대한 몽상을 물리적으로 현실화한 결과다. 인문적 발상이란 그 자체로 이상을 통해 현실을 돌아보도록 하는 꿈인데, 몽유병 환자들이 곧바로 육체의 세상을 지배해버린 셈이다.
선비에겐 선비의 현장이 있다. 선비의 길도 똑바로 걷지 않은 채, 그렇다고 장사를 하지도 공사를 하지도 않는 자가, 그저 선비를 까는 것으로 공사치고 장사한다. 과연 누가 기생하고 있나. 비주류 언더도그마 포지셔닝으로 결국 실리를 위해 하는 일이 뭐지? 리슨 앤 리피트. 선창합니다, 따라하세요. 실리? 실리! 실리? Silly!
방구석에서 주문을 외며, "난 달라" 자위하기. 나는 그것을 도저히 인문학이라 불러줄 수 없지만, 알 만한 사람들이 무책임하게 박수 쳐주면 다 통하는 세상이다. 그래, 그것도 자기 실리를 위한 재주다. 인정? 응, 인정.
송지연 우송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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