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마중지봉(麻中之蓬 : 삼밭 가운데 나 있는 쑥은 누가 붙잡아 주지 않아도 삼을 닮아서 키가 곧게 자란다는 뜻으로 좋은 사람을 가까이 하면 좋게 동화된다는 뜻)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우리 사람도 꽃과 친하여 가까이 살다보면 사람다운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꽃에 동화되면 인간답지 못한 사람도 꽃을 닮아 꽃의 향과 같은 사람 냄새를 풍기며 살 수는 있으리라는 상상에 빠져 본 것이다. 아래 삽화의 주인공도 자연스레 꽃에 동화되어 꽃의 향과 같은 사람냄새를 풍기며 사는 삶이었으면 좋겠다.
시골 농부가 온갖 정성을 기울여 어렵게 3대 독자 아들 하나를 낳았다. 농부 아버지는 귀한 아들을 잘 가르쳐 보려고 자기 집 근처에도 학교가 있었건만 고등학교부터는 서울로 진학을 시켰다. 그래서 아들은 서울 소재 대학을 다니게 되었다. 무더운 어느 여름 날 대학 다니는 아들 철희한테서 편지 한 통이 왔다.
편지를 뜯어보니「이번 달 하숙비 35만원, 책값25만원, 용돈 30만원, 등록금 800만원, 총액 890만원」을 보내달라는 내용이 씌어 있었다.
이것은 편지가 아니라 세무서를 대신한 세금 청구서나 다를 바가 없었다. 농부 아버지는 편지를 다 읽기도 전에 아들 편지를 처음 받았을 때 반갑고 좋았던 감정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한숨 반에 표정은 구름 낀 날씨 같았다. 대학 등록금 마감 날짜가 얼마 남지 않은지라 우선 돈이 될 만한 것은 머리에 다 떠올려 주판알을 튕겨보는 것이었다. 암송아지 1마리 팔고 농사지은 쌀 3가마에 돼지새끼 3마리, 누렁 씨암탉 2마리, 의성육쪽마늘 3접에 새끼강아지 3마리까지 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아들한테 가지고 갈 돈 890만원에 많이 부족하여 고민 끝에 이웃집 영수 아버지 삼식이한테 가서 융통해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이웃의 온정 덕분에 겨우겨우 부족한 돈을 채우게 되었다.
돈 마련은 어렵게 했어도 보고 싶은 아들 생각에 편지봉투의 아들 주소 하나만 들고 아버지는 상경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고층 건물이 즐비하고 자동차가 전후좌우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농부 아버지의 정신은 혼이 다 빠지는 것 같았다.
촌티 나는 농부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써 장만한 여름 모시로 된 바지에 남방을 입고 중절모를 썼다. 그 차림에 소가죽 수제화 구두를 신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을씨년스러워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손에는 아들 갖다 주라고 아내가 만들어 준 쑥개떡에 보약 1병, 거기다 아들 하숙집 주인 주려는 찹쌀 두 되, 마늘 한 접이 바리바리 싼 보자기 보따리가 손에 들려 있었다.
집 떠날 때는 별 걱정 없이 올라온 서울이었지만 와서 보니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편지봉투의 주소 하나만 가지고 이 골목 저 골목 헤매다 보니 더운 날씨에 땀은 나서 옷은 젖고 얼굴에는 땟국물이 흘렀다. 땀으로 젖은 꾀죄죄한 모습은 감추려고 해봐야 감출 수가 없었다.
새벽차로 와서 복잡하고 낯선 서울 거리 한나절 이리저리 헤매다 보니 시간은 벌써 오후 1시가 지났다. 아들 만나고 그날 해전에 귀향하려던 아버지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리하여 생각 끝에 파출소를 찾아 경찰의 도움을 받았다. 경찰의 안내를 받아 아들 하숙집을 어렵게 찾았다.
대문 초인종을 누르니 주인아저씨 같은 사람이 나왔다. 문을 열어주어 흘낏 쳐다보니 발 친 사이로 보이는 대청마루에 5사람 정도가 앉아 장기와 바둑을 두는 것 같았다. 그 중에 농부의 아들놈 철희도 있었다. 대학생 같아 보이는 몇 사람이 한쪽에선 장기를 두고 다른 한쪽에는 바둑을 두는데 그 집 하숙생들 같아 보였다.
문을 열어 준 주인 아저씨가 대문 앞에서 "철희 학생 ! 이 분이 철희 학생을 찾는데 이 분이 뉘신가 나와 봐!"
철희가 바라보니 허술한 차림의 꾀죄죄한 모습의 주인공은 틀림없는 자신의 아버지였다. 철희는 잠시 동안 머뭇거리며 말을 못하고 있는데 재차 주인아저씨가 "철희 학생 ! 이 분이 철희 학생을 봤으면 좋겠다는데 이 분이 뉘신가 말해 봐!"
장기 두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젊은이가 "철희야, 그 분이 누군데 그래!"
순간 철희는 난처한 표정으로 멈칫멈칫하다가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우리 집 머슴이요!"
그 소리는 알아듣지 못 했어야 했는데 아버지는 그 말을 알아들었다. 순간 아버지는 눈이 캄캄해졌다. 하늘이 무너지고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물 콧물 땀으로 뒤범벅이 된 액체가 가로 세로 마구 흘러 얼룩진 얼굴을 흉물로 만들었다. 농부 아버지는 문간을 들어서지도 않은 채 캄캄한 눈으로 더듬거리며 고향집에 내려와 농약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
돼지한테서는 돼지 냄새가 나고 개한테서는 개 냄새가 난다. 또한 소한테서는 소 냄새가 나고 염소나 고양이한테서는 그 특유의 냄새가 난다. 이런 논리로 말한다면 사람한테서는 사람냄새를 풍겨야 정상이 아니겠는가! 사람한테서 사람 냄새가 나지 않고 짐승 냄새보다 못한 악취가 풍기는 철희같은 사람을 종종 볼 수 있는 현실이어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아들놈은 모습만 사람이지 사람이 아니었다. 제 아비를 머슴이라니 세상이 뒤집어지는 개벽에 천지개벽을 거듭한다 해도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될 수는 없다. 형상은 틀림없는 사람인데 짐승 같은 냄새를 풍기다니…….
사람은 사람 냄새를 풍기며 살아야 한다. 사람냄새 풍기지 않는 삶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누구나 사람 냄새나는 생활로 짐승 아닌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사람한테서 짐승 냄새가 나다니…….
사람한테서는 사람 냄새가 물씬 풍겨야 한다.
농부가 철희를 사람냄새 모르는 귀공자로 키우지 않고 매운바람 속에 눈비 다 맞으며 향내 나는 야생화로 키웠다면 그는 참 아버지가 되었을 텐데…… !
'사람한테서 짐승 냄새가 나다니'
우리 모두의 숙제로 풀어야 할 인생 방정식이 되기를 바란다.
남상선/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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