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진 경제과학부장 |
오시는 날은 다르지만, 기차를 타고 대전역에 도착하는 시간은 항상 같다. 언제나 같은 기차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무궁화호’다. KTX를 타면 20분 남짓 거리인데, 1시간 20분 가까이 걸리는 무궁화를 타신다.
요금도 싸고 시간도 많아서라고 하셨다. 더 마음에 드는 건 무궁화호가 천천히 달려서란다. 어머니께선 KTX를 ‘메마른’ 기차로 규정했다.
너무 빠르고 너무 금방 도착해 기차를 타고 아들 집에 간다는 기분조차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요즘엔 비둘기호가 다시 생겼으면 좋겠다는 말씀까지 하실 정도다.
‘비둘기호’, 오랜만에 들었다.
비둘기호는 1967년부터 2000년 11월 14일을 끝으로 멈춰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완행열차다. 백과사전은 비둘기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967년 8월 경부 특급의 증기기관차에 처음 붙여진 여객열차의 이름으로, 서울∼부산 구간부터 운행했다. 이후 1983년까지 열차는 모두 새마을과 우등, 특급, 보급, 보통으로 불렸는데, 이 가운데 가장 느린 보통이 비둘기호다.’
기억을 더듬자면,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 어머니의 손을 잡고 오른 친척집 탐방길엔 어김없이 비둘기호를 탔다. 비둘기호는 타는 곳으로 진입할 때 찢어질 듯한 굉음을 질러댔다. 멈추기 직전까지 멈춤을 위한 고통의 신음은 계속됐다.
멈출 때도 남달랐다. 객차 안에 있는 승객들은 모두 손이나 다리에 힘을 줬다. 멈춤의 고통이 극에 달할 때 승객들의 몸은 기차 진행 방향으로 쏠린다.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앞으로 쏠렸다가 다시 반대방향으로 확 쏠린다. 찰나의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넘어지는 승객이 한둘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비둘기호의 최대 강점은 ‘소통’이다.
비둘기호의 좌석은 움직일 수 없도록 고정돼 있다. 또 4명이 서로 마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당연히 대화는 자연스럽게 오간다. ‘어디 가시냐’라는 말문이 열리면 도착지까지 사이다와 삶은 달걀을 나눠 먹으며 대화를 이어간다. 마주 보는 좌석이 중간에 하나씩밖에 없어 말 한마디 하기 어려운 KTX에선 상상도 못 할 일이 비둘기호에선 일상이었다.
비둘기호는 단 하나의 역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조금 달리는가 하면 금방 속도를 줄여야 했을 정도로 모든 역에 멈췄다. 비둘기호는 곳곳에서 교통의 중심임을 자부하던 수많은 역의 동반자였다. 수많은 사람이 북적대던 호황기의 역들이 사라진 것도 비둘기호의 운명과 함께했기 때문이다.
느린 만큼 요금도 가장 쌌다. 그러다 보니 통학하는 학생이나, 시장에 나서는 장사꾼, 출근하는 직장인 등 대부분 서민이 주요 고객이었다. 오랫동안 운행하며 종착역에 도착한 비둘기호는 비록 지저분했지만, 서민의 삶이 그대로 배어있었다.
비둘기호와 비둘기호보다 조금 더 빨랐던 통일호가 더 이상 철길을 달리지 못하게 된 건 효율성 때문이라고 한다. 말이 효율이지, 사실 죄다 돈 때문이다.
비둘기와 통일호가 지배하던 철길시대, 가장 비싸고 가장 빨랐던 최첨단 열차인 새마을호도 이번 달 30일 마지막 운행을 끝으로 멈춰 선다. 5월 1일부터는 비둘기호, 통일호와 함께 철도박물관에서만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된다.
꼭 빨리 가야 시대를 주도하고 앞서가는지, 그래야만 효율성이 높아지는지 생각할 때가 있다.
천천히 가면 안 될까. 어차피 도착하는데, 조금 느려도 괜찮지 않은가.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