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일색 양귀보다 더 예쁘고, 문미(文美)에 지(智)까지 겸비한 황진이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 왕소군. 그 미모가 어떠했을까?
왕소군의 첫 번째 사내는 한(漢)나라 황제인 원제(元帝)고, 두 번째 사내는 남쪽 흉노족 왕인 호한야 선우(왕의 호칭)이며, 셋째 사내는 호한야 본처의 아들인 복주루 선우인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웠기에 한나라 황제가 취하고, 흉노족의 왕과 아들 사이인 부자지간이 취하고, 그 미모 때문에 유명 화공(畵工)인 모연수가 참수를 당하고, 날아가던 기러기까지 낙안(落雁)되었을까?
한번보자. 그 유래를.
한(漢)나라 황제인 원제(元帝)는 호색가였다. 대궐에 있는 궁녀들도 부족하여 전국에 후궁을 모집한다는 조서를 내렸는데 (건소(建昭) 원년 (BC38), 전국 각지에서 선발된 궁녀들의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때 미모의 왕소군(본명 왕장(王?))도 18세의 나이에 후궁으로 선발되어 입궁하였다. 황제는 수천 명에 이르는 궁녀들의 신상을 일일이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화공(畵工)인 모연수(毛延壽)에게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했다.
예나 지금이나 뇌물의 힘은 큰 것. 부귀한 집안 출신이나 수도 장안에 후원자가 있는 궁녀들은 화공에게 자신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 달라고 뇌물을 바쳤으나, 왕소군은 집안이 가난한데다가 아는 사람도 없어 자신의 용모를 황제에게 속일 마음이 없었으므로 뇌물을 바치지 못했다. 뇌물을 좋아하는 모연수는 뇌물을 바치지 않은 왕소군의 용모를 형편없이 못생기게 그려 황제에게 바쳤다. 그러해서 왕소군은 입궁한 지 5년이 흐르도록 황제의 얼굴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보자. 반전되는 이야기를. 어찌 모연수가 이를 알았으랴.
입궁하여 쓸쓸히 지낸지 5년, 왕소군의 나이 23세. 남흉노의 호한야(呼韓邪) 선우(흉노족 왕의 호칭)가 원제를 알현하기 위해 장안으로 왔다. 호한야는 모피와 준마 등 많은 공물을 가지고 와서 황제에게 공손하게 문안을 올렸다. 크게 기뻐한 황제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호한야 를 환대했다. 호한야는 원제에게 황제의 사위가 되고 싶다고 청하였다. 원제는 그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공주를 시집보내기 전에 먼저 그에게 한나라 황실의 위엄을 과시하고 싶어 자기 후궁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와 술을 권하게 했다. 궁녀들이 들어오자 호한야는 다채로운 모습에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그중에서 절세의 미인을 발견하고는 즉시 원제에게 또 다른 제의를 했다.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미녀들 중의 한 명이어도 괜찮습니다."
황제인 원제는 원래 종실의 공주들 중에서 한 명을 택하려고 하였으나 이제 궁녀들 중에서 한 명을 선발한다면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호한야의 제의를 즉석에서 수락하였다. 호한야는 23세의 절세가인 왕소군을 지목했다. 너무나 아름다운 왕소군의 미모에 원제도 그만 반하고 말았다. 생각해보라. 아직 다른 사내들의 손때도 묻지 않은 방년 23세의 숫처녀의 모습을. 황제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황제로서 한번 내린 영을 다시 번복할 수도 없었다.
자신을 속인 화공을 그냥 둘 수 없었다.
원제는 연회가 끝난 후 급히 돌아가서 궁녀들의 초상화를 다시 대조해 보았다. 왕소군의 그림이 본래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것을 발견한 원제는 그림을 속여 그린 모연수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토록 명령했다. 모연수는 결국 황제를 기만한 죄로 참수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남정네의 욕구는 노소불문이고 지위고하를 따지지 않고 발정(發情)하는 법. 우리는 요즘 미투에 걸려드는 남정네들을 보면 설명이 필요 없다. 원제는 잔머리를 굴렸다. 그냥 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한야에게 혼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3일만 기다리라고 속이고는 조용히 왕소군을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 사흘 밤 사흘 낮을 욕정을 채웠다.
3일 후, 왕소군은 흉노족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에서 원제에게 작별을 고하였으며,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세월이 흘러 호한야 선우가 죽은 후, 호한야의 본처 아들인 복주루(復株累) 선우가 왕이 된 후 왕소군을 취했다. 아버지의 애첩을 취했던 것이다. 왕소군은 다시 복주루의 첩이 되어 딸 둘을 낳았다. 왕소군이 죽은 후 그 시신은 대흑하(大黑河) 남쪽 기슭에 묻혔다 한다. 왕소군의 묘는 내몽고 후허하오터(呼和浩特) 남쪽 9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가을에 접어든 이후 북방의 초목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왕소군 무덤의 풀만은 푸름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에 '청총(靑塚)'이라 하였다고 하고, 공중을 날아가는 기러기도 그 미모에 취해 날개짓 하는 것을 잊고 땅에 떨어졌다(落雁)한다. 이 이야기는 《서경잡기(西京雜記)》에 나온다.
왕소군에 대한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면서 시가, 소설, 희곡 등의 각종 문학 양식을 통해서 그 형상이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고, 필자도 그의 미모에 취해 추상화를 그리며 도취 돼 있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胡地無花草(호지 무화초)-오랑캐 땅이라 한들 화초마저 없겠느냐?
春來不似春(춘래 불사춘)-(왕소군이 없는 곳엔)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네.
自然衣帶緩(자연 의대완)-옷에 맨 허리끈이 절로 느슨해지니
非是爲腰身(비시위요신)-가느다란 허리 몸매를 위함은 아니라오.
당나라 시인 동방규(東方)도 이 사연을 읊어 그 유명한 '춘래불사춘'이란 말을 남겼던 것이다.
조심하라 남정네 들이여! 미투 때문에 하루아침에 가정이 무너지고, 공든 탑 무너지는 남정네들이 얼마나 많으며, 구린내 나는 뇌물 받아먹고 좀비 노릇하는 인간들이 그 얼마인가?
-시민대학 '재미있는 고사성어반'에서 배운 이야기를 바탕으로 썼습니다. 매주 금요일 14시 보문산 관 603호실입니다.
김용복/ 극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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