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미령의 포병 |
오산에서는 한양(서울) 방면 남북 교통로는 물론 당항성이 있는 남양만, 아산만 방면, 남한산성이 있는 광주(廣州) 방면으로의 과거 횡적 연결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독산성 동쪽 교통로상 오산으로부터 죽미령 남쪽 인근에 조선시대 성환도상의 청호역(靑好驛)이 설치됐었다. 과거 성환도(成歡道)는 대체적으로 오산 성환-소사-성환-신은 방면으로 내려가는 바 청호역은 그 중간 경유역이었다.
춘향전 속 춘향을 보고 싶은 마음에 마음 급한 이도령의 사설에 등장하는 떡점거리(병점), 중미(中彌)고개, 오미장터(오산), 소사 등이 이 길 따라 났다.
죽미령 초전기념비와 참전국기 |
6.25사변 당시 한국은 파죽지세로 남침하는 공산군에 밀려 유엔에 지원을 호소했다. 전쟁 발발 3일 만에 유엔은 무력 저지를 결의하고 전투부대로 참가한 16개국을 위시, 30여 개국이 전쟁에 개입했다. 그에 앞서 전초부대로 미국은 일본에 주둔하던 미8군사령부 제24사단 2연대 소속 1개 포병대를 포함한 특수임무부대 스미스부대 540명을 선발대로 투입했다. 7월초 우중에 그들이 최초로 방어선을 구축한 곳이 바로 죽미령이다. 그러나 적에 대한 정보 부족 속에 적을 과소평가하여 경비 역할 정도로 가볍게 생각한 채 소규모 화력만을 소지한 그들은 40여 대의 탱크와 막강한 화력으로 무장한 2개 사단의 적을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7월 5일 죽미령 고갯길을 중심으로 좌우에 중대를 배치하여 저지선을 형성하던 중 8시경 T-34탱크를 앞세우고 고개를 올라오는 적을 향해 후방 수청리에 배치됐던 105mm 포들을 발사하는 동시에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맞섰다. 그러나 워낙 적의 우세한 병력과 화력에 저지선이 뚫리고 우회해 들어온 적에 의해 후방 포부대가 붕괴되면서 겨우 벗어난 아군들은 부득이 안성 방어선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1/3이상인 110명의 사상, 실종 72명의 대 희생 끝에 결국 6시간만에 후퇴했다. 이 때 적들도 127명의 사상자와 탱크 6대가 파괴됐다.
죽미령 전투 전개도 |
참전비 인근 남쪽 금암동과 기념관 뒷산 너머 북쪽 외삼미동에 청동기 시기 지석묘군과 주거 유적지들이 있다.
조영연 / '시간따라 길따라 다시 밟는 산성과 백제 뒷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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