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톡] 사랑스런 갑(甲)의 횡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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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톡] 사랑스런 갑(甲)의 횡포

남상선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 승인 2018-04-06 10:45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요즈음은 시간이 과속으로 달리는 느낌이다.

아마도 나이가 들어가는 징조인가 보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한 살 더 먹은 기분이니 시간은 나이에 비례해서 가속이 붙는다는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지난 달 가졌던 고등학교 동창 모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나간 것이 아닌가. 오늘도 월례행사가 된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 갔더니 친구가 며칠 전에 손자를 보았다고 기쁨에 자랑 섞인 이야기를 했다. 어떤 친구는 시집간 딸이 효도관광을 시켜 줘 해외여행을 다녀왔다는 이야기도 했다. 만나서 하는 이야기들이 손주 키우는 이야기를 하며 그렇게 예뻐 죽겠다는 이야기를 입담 좋게들 늘어놓았다.

여기저기서 장진된 총알을 쏟아붓는 듯한 느낌이었다. 손자 없는 나에게는 은근한 부러움이 아닐 수 없었다. 반주삼아 나오는 손주들 재롱떠는 이야기들이 봇물을 이루었다. 은근히 자랑으로 즐기는 어투들이었다. 좌담의 화제가 정해진 건 아니지만 손주들 키우는 이야기에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건강관련 이야기들이었다. 십년 전만 해도 들을 수 없었던 건강 이야기들을 자주하는 것으로 보아 나이가 들어가고 있는 자신들을 은근히 걱정하는 눈치들이었다. 팔다리가 쑤신다는 이야기, 관절염으로 고생한다는 이야기, 전립선 문제로 치료받는 이야기, 허리디스크 요추협착증 등으로 고생하는 이야기 등등은 소유주가 따로 없는 우리 모두의 공유물이었다.

모두가 노인 가도를 걷고 있다는 어설픈 감상(感傷)에 가슴 한 구석이 얼룩지는 듯했다. 오늘의 화제는 뭐니뭐니해도 주메뉴는 손주들 자랑이었다. 입담 좋은 이 친구 저 친구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갑자기 칵테일 생각이 났다.



양주를 비롯한 기타 음료에만 칵테일이 있는 줄 알았는데 얼버무려진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친구인 용돈이와 효성이의 이야기도 훌륭한 칵테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엔 어쩌면 상큼한 와인이나 과일주보다도 더 감칠맛 나는 인생의 향훈이 들어 있어 더욱 감미로웠다. 그도 그럴 것이 거기에는 칵테일 된 음료수에서는 맛볼 수 없는 세상사 희로애락이 무르녹아 흐르고 있으니 미식가의 풍미가 아니라도 별미로 느끼는 칵테일 맛이 아니겠는가!

동창회 모임의 상머리엔 술만 있었지 입맛을 돋구는 안주는 없었다. 칵테일 된 손주들 자랑이 안주를 대신했기 때문이다. 아니 집집마다 정성껏 싸 가지고 온 손주들 자랑거리안주에 자리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세상사 시달리는 일로 일그러진 주름살까지 펴지게 하는 손주들의 재롱이야기에 사람냄새 풍기며 사는 몇몇 친구의 이야기가 어쩌면 소곱창이나 삼겹살구이, 동태찌개, 낙곱창보다 더 감칠맛 나는 술안주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모임의 목적이 이런 것은 아니었을 터인데 그날 모임은 손주들 자랑을 하러 온 사람들 같았다. 부러웠다. 한 가정에 새 생명이 태어나 두 눈 반짝이며 재롱떠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생에 또 다른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나에게도 축복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있다. 장성한 애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장성한 내 아이들에게 신의 축복이 내리지 않는 것이 답답했다. 도무지 애들 배우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게 웬 일. 아들에게 축복이 내려졌다. 귀빈같은 며느리가 나에게도 생긴 것이다. 그런데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록 그렇게 부러워하던 손주는 태어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되지 못한 것이다. 초조해지는 마음에 매일 새벽마다 기상하여 청원기도로 허기를 채웠다. 며느리를 맞이한 지 3년이 되었는데도 희소식은 없었다.

나에게 두 번째 축복이 내려졌다. 사윗감이 생긴 것이다. 딸 시집 못보내 안달하던 나에게 월하빙인(月下氷人)이 측은하게 여겨 맺어준 인연이라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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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 이미지 뱅크
어느 날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한발(旱魃)에 단비를 기다리는 농부에게 환한 미소가 터지는 듯한 순간의 기쁨이었다. 드디어 외할아버지가 된다는 소식에 막혔던 가슴의 체증이 뚫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가뭄의 대지에 내린 단비를 맞고 돋아난 새싹처럼 외손녀가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라는 호칭을 들을 수 있게 해준 외손녀가 마냥 사랑스럽기만 하였다. 언제까지나 설레는 환한 가슴으로 살고 싶었다. 구김살 없는 어린애가 소중한 선물을 받은 마음으로 마냥 좋아하며 살고 싶었다.

손주가 태어나기 전에는 남부럽지 않은 손주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응애'하는 인기척으로 세상에 나왔을 때에는 또 염원하는 새벽 기도로 다른 소망을 아뢰게 되었다. 새벽 기도가 하루 세끼 주식보다 더 중요한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주님의 은총으로 태어난 우리 다인이 착하고 건강하게 자라 부모 마음을 기쁘게 해줌은 물론 천하의 영재로서 보석같이 빛나되 늘 겸손하고 겸허한 생활로 우리 다인이의 재능과 훌륭한 장점이 돋보이는 삶이 될 수 있게 해 주소서. 또한 우리 다인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게 해 주시고, 국가 사회의 유능한 동량지재가 될 수 있게 해 주시며 우리 다인이가 누리는 광영이 이 세상 온 누리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게 해 주소서. 아울러 우리 다인이 사람냄새 물씬 풍기며 사람답게 사는 삶으로 칭송받고 존경받는 삶의 본보기가 될 수 있게 해 주소서.〃

손주가 없을 때는 손주 보게 해 달라 기도를 하고 태어난 후에는 거기다 욕심의 프리미엄까지 붙은 기도를 드리고 있으니 사람의 욕심에는 한이 없는가 보다 싶었다. 이런 자신을 생각해 보니 득롱망촉(得?望蜀)이란 고사의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에 어쩌면 나도 예외가 아닌 세속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보이는 것 이상으로 감탄을 자아나게 하고 있으니 천하의 재력가나 권세가라도 감히 세월의 위력을 필적할 수 있으랴! 자연의 섭리라 하지만 원초적인 씨 하나에서 각양각색 다양한 생명체가 태어나고 성장하여 각기 그 존재 가치를 과시하고 있으니 시간의 위력을 어찌 간과할 수 있으랴!

외손녀 다인이도 이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서인지 아니면 간절한 기도의 응답에서인지 영리하고 예쁜 모습으로 잘 자라 주었다. 이제는 나도 어떤 모임에 가서라도 손주 자랑하는 자리가 있다면 '에헴'하는 헛기침 소리를 어떤 누구보다도 크게 낼 것 같았다.

우리 다인이가 나에게 목에 힘을 주어 기침 소리를 크게 낼 수 있는 늙은이로 만들어 주었으니 요 깜찍할 정도의'하지(할아버지)' 하는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마냥 예쁘고 귀엽기만 하다.

내 분신인 아들딸도 외손녀 다인이만 할 때가 있었건만 귀엽고 예쁘기가 손주에 비할 바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네 살 박이가 벌써 어린이집에 다닌다니 자연의 섭리와 시간의 위력에 새삼스런 경탄까지 나왔다.

지난해 어린이 날.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에미야, 오늘 시간 어때?"

"왜 아빠?"

"오늘 어린이날이잖아. 다인이 재롱을 공짜로만 볼 수 없잖아,"

'하지 하지' 하는 외손녀의 손을 잡고 옷 한 벌 사주러 백화점을 찾았다. 모든 축복이 나에게로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딸도 좋아했고, 외손녀도 좋아했다. 이런 모습을 바라보는 나는 지갑을 만지작거리며 행복해하고 있었다. 딸애 맘에 드는 외손녀 옷 한 벌을 샀다. 다인이는 옷에는 관심이 별로 없고 시선을 엉뚱한 곳으로 돌렸다. 옷 코너 옆에 완구 장난감들이 우리 다인이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 같았다. 제 엄마와 이 하지(할아버지) 손을 끌며 이것도 저것도 사 달라는 것이었다. 손에 잡는 것마다 고가의 완구들이어서 저의 엄마가 난색을 하며 그냥 끌고 나가려는 것이다. 딸의 난감한 표정과 울상을 짓는 모습은 영락없는 아이의 모습 그대로였다. 순간 인형처럼 예뻤던 외손녀의 일그러진 울음 직전의 딱한 얼굴이 보였다. 분명 집에서 나올 때는 어린애가 외손녀 하나뿐이었는데 갑자기울상을 짓는 어린애가 둘이 되었다.

할아버지 체면에 울상의 인형을 그냥 데리고 나올 수는 없었다. 지갑을 열지 못하고 카드를 긁었다. 졸지에 팔자에 없는 투자를 하게 되었다.

"3개월 할부로 해주세요."

고가의 완구를 울상의 인형에게 안겨 주었다. 예측하지 못했던 갑(甲)이 나에게 생긴 것이다. 분명 이 순간만은 우리 다인이가 나에겐 갑(甲)인 것이다. 그의 요구를 안 들어 줄 수가 없다. 사랑스럽게, 그것도 세상에 태어나 처음 할아버지인 나에게 갑의 행세를 하는데 안 들어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예측하지 못한 즐거운 투자가 외손녀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래,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인이 같은 갑(甲)의 행세를 한다면 얼마나 좋으랴!'

다인이의 어린 손을 잡고 백화점을 나오면서 다인이와 내 몸 속에는 어떤 액체보다 진한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남상선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남상선210-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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