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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일반적으로 동양화에는 '여백의 미학'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동양화에서는 서양화와는 달리 그림의 전체를 꽉 채우지 않고 가급적 많은 여백을 두고, 그 여백을 통해서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각자의 마음으로 그 여백을 보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여백에 숨어 있는 작가의 마음을 우리는 우리의 방식으로 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여백의 미학'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은 아마도 어떤 과학적이거나 이론적인 설명만으로는 불가능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여백의 미학'은 어찌 보면 '미완성 속에서 완성'을 찾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만약 동양화에서 눈이 내려 세상이 하얗게 변한 모습을 그린다고 하면, 아마도 그 세상을 직접 그리기보다는 눈이 쌓여 있는 세상을 그냥 그리지 않고 그대로 여백으로 남겨 놓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런 것을 '여백의 미학'이라는 말로 설명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것은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지만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을 그리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비단 눈이 온 세상을 표현하는 것만이 아닐 것입니다. 만약 눈이 오지 않고 햇살이 눈부시게 비치는 세상도 역시 너무나 찬란하기에 아무것도 그릴 수 없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흔히 말하는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이렇게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세상이 모든 세상을 담아내고 표현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의도적으로 세상을 그리기 위해 여백을 두고, 완성이 아닌 미완성으로 세상을 표현하고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백과 미완성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미완성을 통해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스스로 완성을 하라고 의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인생이 지나온 과거에 대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하고 설명할 수는 있지만, 미래에 대한 인생은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더라도 그것은 어떤 '가정'을 전제로 한 것이고 미래의 완성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현실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아직 오지 않은 인생은 아직도 여백이나 미완성으로만 표현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지나온 길을 그린다고 할 때도 지나온 과거는 물론 그 과거를 겪어온 자신만이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볼 때도 경우에 따라서 자신의 눈에는 보이는 것도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있고 또 다른 모든 사람의 눈에는 보이는 것도 자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여백'에서, 그 여백에 숨어 있는 것을 보는 혜안을 가진 사람들을 우리는 부러워하고 존경하기도 합니다. 그런 혜안을 갖고 있는 분들은 바로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보는 눈을 가진 능력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이런 모든 것을 보는 사람을 다른 측면에서 어쩌면 진실하지 못하고 가식을 가진 일종의 몽상가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볼 수 없다는 이유로 평가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이 보는 것을 진실로 믿을 수 없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인다고 하니 한편으로 억지를 부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고 학식이 높고 존경 받는 분이 모든 것을 본다고 하면, 우리는 그 분의 말에 신뢰를 갖고 그분을 더 우러러 볼 것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어떤 여백이 가득한 그림을 보는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아이의 눈에는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여백의 미학'이라고 설명되는 것이 아이의 눈에는 어른들이 억지를 부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아이를 우리는 나무라거나 비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는 아이가 어쩌면 더 진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세상을 그리는 방법은 각자가 다릅니다. 아무리 열심히 생각하고 고민해서 세상을 그린다고 해도 정말 아무것도 그릴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싶은 세상이 도화지 속에 그림으로는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나 혼자만의 세상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라면 더 그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표현되지 않는 세상, 표현할 수 없는 세상,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는 세상이 그 어디엔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표현할 수 없고 보이지 않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쫓으며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그릴 수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세상을 어떻게 그리고 표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나에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살아온 세상과 내가 살아온 인생을 그리는 것만큼이나 '내가 그리고 싶은 세상'이 과연 존재할까라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내가 그리고 싶은 세상'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내 '내가 그리고 싶었던 세상'을 잊고 살아 왔습니다. 현실이라는 사실 때문에 '내가 그리고 싶은 세상'을 잊었다는 것은 어쩌면 변명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이라는 벽 때문에 '내가 그리고 싶은 세상'은 너무나도 먼 세상인 것으로 인식되었고, 그 때문에 '내가 그리고 싶은 세상'은 나로부터 멀리 잊혀버렸습니다. 분명히 '내가 그리고 싶은 세상'을 생각할 때는 어렴풋하지만 그 어떤 모습이 있었는데, 그 모습이 이제 떠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내가 그리고 싶은 세상'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 세상은 '여백의 미학' 속에서 '미완성 속의 완성'을 위한 세상도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지금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세상은 '여백'이나 '미완성'보다는 아름답게 빛이 나는 행복한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더 큽니다. 아름답게 피어나 찬란한 모습을 빛내는 벚꽃의 아름다움보다 더 빛나는 그런 세상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번 주말 '내가 그리려고 했던 세상'이 과연 무엇이었나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과연 그 세상이 '내가 그리고 싶은 세상'인지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행복한 주말되시길 기원합니다.
대전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박광기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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