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원 박사 |
대통령의 해외순방 일정은 오래전부터 상대국과 치밀한 협의를 거쳐 결정된다. 23일 대전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서해 수호의 날' 기념식에 군 통수권자인 문재인 대통령이 안 보였다. 서해 수호의 날은 2016년부터 천안함 폭침과 제2연평해전, 연평도 포격으로 희생된 용사들의 넋을 기리고 안보의식을 고취하자는 취지로 열리는 기념식이다.
그런가 하면 이명박 전 대통령이 한밤중에 구속됐고, 문 대통령 해외 순방 직전에 청와대는 3일에 걸쳐 헌법개정안을 발표했다. 이게 우연일까?
청와대 개헌안에 담긴 내용도 중요하지만, 헌법을 고치는 일이라면 그 절차 역시 중차대한 사안이다. 게다가 대통령을 보좌하는 민정수석이 개헌안 발표한 것은 위헌 소지가 다분하다는 지적도 있다.
원로 헌법학자 허영 교수는 "국무회의 심의를 규정한 헌법 취지로 봤을 때 내각에서 사전 논의가 이뤄져야 하고 발표도 정부 대표가 하는 게 옳다"고 지적했다.
반면 조국 민정수석은 "(개헌안은) 대통령의 의지, 국정 철학, 헌법 정신에 대한 소신이 반영되는 것이므로 대통령 보좌관, 비서관이 헌법에 그 내용을 담는 것은 권리 이전에 책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대통령을 보좌하는 권리와 의무 이전에 헌법이 정한 절차에 따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탄핵당했다. 이게 무슨 의미인 줄 모르는가. 헌법을 간과한 채 행해진 위헌-위법행위에 대한 결과인 것이다.
절차를 어기면서까지 대통령을 제왕처럼 떠받들겠다면 할 말이 없다. 역대 대통령들이 줄줄이 감옥에 가는 것도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행사와 결코 무관치 않다는 점에서 청와대의 변명은 설득력이 취약하다.
국무회의를 통해 통과되면 정식 발의를 할 것이라는 게 청와대의 입장이다. 현행 헌법 89조에 따르면, 개헌안은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발의해야 한다. 정부와 여당이 심도있는 논의를 거쳐도 힘든 판인데, 청와대가 개헌특위 자문위 권고안만 갖고 정부의 개헌안이라고 굳이 나설 필요가 있을까. 권고안은 그저 안(案)에 불과하기에, 정부와 신중하게 손질해야 마땅하다. 청와대가 독단적으로 행할 일이 아니다.
청와대 발표 직후 국회를 방문해 여야 대표를 만나 개헌안을 건네는 정무수석의 행보가 궁색하다. 청와대 눈치 보는 여당이야 반기는 모습을 보였지만, 여타 야당들은 볼멘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청와대가 성급했다. 개헌이슈를 선점해서 문 대통령의 개헌공약을 실현하겠다는 정치적 제스처는 설령 좌절돼도 잃을 게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절차를 무시하면서 청와대가 개헌안을 3차례 걸쳐 국민브리핑 형태를 취한 것을 보면, 대국민 여론전에 직접 나서겠다는 의미다.
어쨌든 청와대로선 개헌안으로 '꽃놀이 패'를 만든 셈이다. 야당이 반대해도, 개헌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어도 그만이다. 문 대통령은 대선공약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야당의 반대로 좌절되었다는 빌미를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여야가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신이 없는 데, 개헌안이 눈에 들어올까. 이런 연유에서 지방선거를 앞두고 개헌을 전략적으로 이용한다는 비난도 나오고 있다.
이쯤 되면 야당도 자성해야 한다. 개헌 시기와 개헌안도 못 내놓고 여야 간에 합일점도 못 찾은 채 엉거주춤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정말 못마땅하다. 대통령 비서가 국회를 향해 엄포를 놓았다고 투덜거리기 전에 야당도 예측 가능한 개헌로드맵을 내놓아야 한다.
청와대 주도의 '개헌 여론전'은 분명 절차부터 문제가 많다. 벌써부터 법조계와 학계에선 국무회의도 안 열고 헌법 절차마저 무시한 졸속 발표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다고 한다. 하지만 디테일은 물론 악마는 '절차'에도 숨어있다. 촛불의 함성과 절차를 무시한 독단적 결정으로 헌법개정이 되는 게 아니다.
/서준원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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