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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탕(平塘)에는 莫其洲는 아우가 살고 있다. 광저우에서 ?山까지 가는 기차 안에서 사귄 중국인으로 원래는 공무원이었으나 가구 공장을 하기 위해 직장생활을 접었다가 가구공장이 문을 닫게 되면서 강가에 큰 배를 띄어놓고 식당업을 하고 있었다. 내가 불쑥 나타나자 놀라면서도 무척 반가워 했다. 최근에 일어났던 얘기들을 간단히 들려주고 곧장 뿌이주(布依族)촌에 가겠다고 하니깐 배낭을 빼앗으며 안 된다고 막무가내다. 집에서 며칠 쉬었다가 가라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그의 집에 가서 이틀동안 쉬기로 했다.
배낭을 내려놓고 곧장 그가 운영하는 강가 식당으로 갔다. 여러 척의 배가 있는 것이 아니라 莫의 배 한 척만 달랑일 뿐, 주변은 삭막하기만 하다. 지난 비에 강물이 불어나 전혀 운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배 안에 들어서면 채광이 좋지 않아 음침하고 정리정돈이 안된 분위기는 삭막하기만 했다. 손님용이래야 4~5명이 앉을 수 있는 실내공간 3개와 갑판 전면 야외 테이블 4개가 전부다. 낮에는 거의 손님이 없고 밤에만 아베크족 아니면 동료들끼리 잠시 들러 맥주 몇 잔 하는 것이 고작이라고 한다. 아직 홍보가 잘 안되어 식사 손님은 가뭄에 콩 나듯 하다면서 투자에 비해 소득이 별로라고 어두운 얼굴을 짓는다.
그에게는 20세 된 아들이 하나 있고 소학교 1학년짜리 늦둥이 딸 하나가 있다. 아들 녀석은 미남형으로 잘 생겼는데 고등학교도 중퇴하고 밖에서 빙빙 돌 뿐, 일할 생각을 않는다며 그의 부인은 아들 보기를 원수(?)보듯 볼 때마다 역정을 내곤 한다. 어린 딸아이는 붙임성이 좋아서 나를 몇 번 만나지 않았는데도 부르면 쪼르르 달려와 덥석덥석 안긴다. 이 집에 재밌는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莫의 부친 얘기다. 그의 집과 100m 거리에 살고 있는 그의 부친은 80세란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건강한 노인이다. 무척 다정다감해서 처음 만날 때부터 악수와 함께 오, 한국친구! 하면서 허깅을 했었다. 그리고는"내가 북조선 인민해방군으로 참전 했었지. 한국… 참 좋은 나라야. 잊을 수가 없어"라는 것이었다. 내 귀가 벌름거리는 것이 들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나는 놀라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릴 때부터 들어왔던 중공군이란 얘기가 아닌가. 참으로 세월이 모든 것을 변화-시켜 주고 있는 셈이다. 예전 같으면 적군이었을 터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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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의 과거를 슬쩍 내비치고는 절대로 입을 안 열겠다는 심사였는지 아무리 물어도 웃기만 하는 노인네였다. 두 번째, 세 번째 만났을 때도 허탕. 네 번째는 근처 정육점에 가서 들고 가기 힘들만큼 곰탕 자료를 사 들고 갔다. 莫의 어머니가 곁에서 듣다가 한마디 거든다.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고 얘기 안 합니까? 지금은 옛날도 아니고 중국과 한국이 친구 나라가 되었는데, 정치 하자는 것도 아니잖소?" 줄 담배만 뻐끔거리던 영감이 드디어 슬슬 얘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며칠에 걸쳐 그의 얘기를 들으며 훗날 장편소설 소재로도 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의 한국전 참전 얘기만 간단히 줄여보면 이러하다. 한국전이 발발하기 전, 김일성은 당시 모택동 주석에게 전쟁을 치르겠다며 도움을 요청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소련으로 갔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무기를 제공 받으며 6.25 전쟁을 도발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유엔군의 참전으로 밀리고 밀리기를 반복하다가 나중엔 다시 모주석에게 달려와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을 고하며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모 주석이 정세 분석을 한 결과 절대절명의 순간임을 알게 되었고, 즉각 팽덕희 장군을 사령관으로 한 북조선 인민해방군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병력이 문제였다.
이때 참모들의 의견을 수렴, 전국적으로 지원병을 모집하게 된다. "내 고향은 원래 사천이었어. 거기서 지원병으로 입대한 것이지. 사천에서만 10여만 명이 넘었을 꺼야. 살아서 돌아오면 얼마, 전사하게 되면 얼마, 이렇게 금액이 매겨 있었어. 보상금이란 것이지. 제대로 훈련받은 기억이 나질 않아. 한 열흘 쯤 목총으로 총 쏘는 흉내만 내고는 압록강까지 행군 또 행군을 했어. 우리가 처음 출발할 때는 늦여름이었는데 압록강에 도착해보니 추운 겨울이야. 당장 입은 옷들이 문제가 되었지. 부대 조직도 지금처럼 체계화 되어있지 않아서 사천에서 온 군인들을 모아 사천부대, 정주에서 왔으면 정주부대, 뭐 이런 식이야. 계급 같은 것도 없었어. 사천부대 하면 부대장이 있고 정치 위, 당서기, 연락병 정도만 누군지 알 정도였으니까."
영감의 얘기만 들어도 당시의 중공군 조직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한성(서울을 지금도 이들은 한성이라고 부른다.) 부근에 이동이라는 곳에 우리 부대가 있었어. 기회가 되면 다시 가보고 싶구먼. 아름다운 시골부락이었는데, 말이야." 하면서 한참 뜸을 들이며(부인이 오나 안 오나 눈치도 보면서) "한국 처녀와 연애를 했었어. 그 아가씨도 나를 많이 좋아했는데, 말이 통해야지!"라며 잠시 회상에 잠긴다. "지금 생각해도 그 곳 물 맛이 참 좋았던 것 같아. 아가씨들도 예뻤고…." 20대 청년 시절 누구나 한 번 쯤 가져 볼만한 로맨스가 아니겠는가. 입을 열 것 같지 않던 그였지만 한 번 시작한 옛날 이 얘기는 그칠 줄을 몰랐다. (그에게 들은 얘기들은 지금도 메모 수첩에 잘 간직 돼 있다. 언젠가는 여기에 뼈와 살을 붙여 독자들 앞에 내 놓을 생각이다.)
#시외버스 기사들의 횡포
한참 얘기가 옆길로 흘렀다. 나는 이틀간의 휴식을 취한 후 하루에 한 번 밖에 없다는 ?水행 버스에 올랐다. 이것 역시 24인승이지만 완전 동물농장이다. 30여 명의 사람과 닭이며 오리, 돼지 새끼, 강-아지 새끼, 염소새끼까지 한 가족이 되어 뒤범벅이다. 10분정도 아스팔트길을 달린 후에는 황톳길과 자갈밭 길을 거듭하며 달린다. 유리창문 절반은 깨지고 없어서 날아 들어오는 먼지가 땀과 섞여 목불인견이다. 일찍 종점에 도착했는데도 앉을 자리가 없어 배낭만 내려놓고 서서 가야만 했다. 앞에 앉았던 손님들이 돌아가며 토해내기 시작한다. 내 바지 자락도 그들의 토사물로 엉망이지만 꾹 참을 수 밖에 없다. 두 시간가량 지나자 시장통이 나오고 버스도 멈춰 선다. 기사가 벌떡 일어나 10분 쯤 쉬고 다시 떠날 터이니 그리 알라고 외치고는 내려 버린다.
다른 사람들을 따라 밖으로 나오니 조금 살 것 같다. 시장통 한 쪽 귀퉁이에 우물이 보인다. 먹을 수는 없고 채소도 씻고 빨래도 하는 우물인 것 같다. 물을 얻어 아쉬운 대로 세수도 하고 바짓가랑이도 대충 씻어냈다. 시장에는 비록 조잡한 상품들이었지만 없는 것이 없다. 어쩌면 우리네 읍시장과 똑같을까. 이들이 주고 받는 말만 바꾼다면 우리나라 어느 읍시장과 똑 같은 풍경이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시장 구경은 재미가 있다. 열심히 사고 파는 상인과 손님들과의 흥정, 조그만 공터마다 뜨내기 약장수들의 익살, 원숭이들의 재롱을 앞세운 호객행위며, 온갖 사행성 오락 등 등 흥미진진하다. 구경에 정신이 팔렸다가 시계를 보니 벌써 15분이나 지나 있었다. 아뿔싸! 차를 놓칠까 싶어 달려 왔더니 고맙게도 아직 출발 전이다. 순박한 농민들은 대만원인체 운전기사를 기다리고 있다. 운전기사는 약속한 10분에 20분을 더 지체하고서야 어슬렁거리며 나타난다. 그리고는 앞바퀴 뒷바퀴를 한 번씩 걷어 차 보면서 저 혼자 무슨 소린가 중얼거린다. 다시 두 시간 쯤 더 달리다가 덜컹덜컹하더니 차가 멈춰서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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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참으로 신기한 것은 한 사람도 불평불만을 터뜨리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참을성 정도가 아니라 도통한 사람들만 같다. 만약 한국에서 이런 장면이 연출되었다면 어떠했을까. 소수민족 취재를 다니면서 언젠가도 언급했듯이 이런 경우는 다반사로 겪어왔다. 두 시간 이상 걸리는 장거리 코스인 경우 한 번도 고장이 안 난 적이 없었다. 우리들이 얘기하는 사전 점검, 차량안전 점검 같은 것은 아예 이들과는 무관한 일인가보다. 달리다가 이상이 생기면 그때그때 수리하면 된다는 의식구조는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승객들 역시 마찬가지다.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기는커녕 운전기사가 고생이 많다며 오히려 위로하고 격려하는 모습들이다. 이런 소리를 들으며 운전기사는 마치 큰 일이라도 치른 사람인양 으스대기도 한다. 참으로 웃음밖에 나오질 않는다. 다시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10분 쯤 달리다가 차가 멈춘다. 기사는 내가 외국인이다 보니 내릴 곳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이곳이 ?水니까 내리라는 얘기였다. 차에서 내리고 보니 은근히 부화가 솟구친다. 10분을 더 타기 위해 두 시간을 기다렸다는 얘기가 되었으니 말이다.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형버스는 다시 먼지를 일으키며 떠나 버렸다. 어디가 어딘지 모를 곳에 하차하고 보니 어리벙벙할 밖에. 그런데 주위를 보니 나와 같이 내린 처녀아이가 한 명 있었다. 그 역시 신기한 듯 제 갈 길을 가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섰다. 내가 미소를 보내자 그녀는 용기가 났는지 어디를 가느냐고 물어온다. 이곳에 뿌이주(布依族)촌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했더니 자기도 뿌이주고 자기가 그 마을에 산다고 했다. (아이고, 하나님! 고맙습니다. 이렇게 철저히 배려해 주셨군요.)
<다음주에 계속>
김인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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