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톡] 법원 조정실서 원고 피고 모두 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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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톡] 법원 조정실서 원고 피고 모두 울다

남상선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 승인 2018-03-09 00:00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게티1
게티 이미지 뱅크
"특별 우편물이요!" 하는 소리에 문을 열어 보았다.

대전가정법원에서 보낸 특별우편물이었다.

내가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으로 위촉 받아 활동 중에 있기 때문에 소장과 답변서를 보고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 준비해오라는 우편물이었다.

맨 위에 철해 있는 유인물을 확인해 보았다. 조정 일정이 20일 후 오전 9시 50분으로 잡혔다. 소장과 답변서를 읽어 보았다. 공무원으로 퇴직한 원고의 아버지가 현금 통장을 남겨놓고 돌아가시는 바람에 5남매간에 유산 상속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형제들이 고인의 통장에 잔고로 남아 있는 1억 6000만 원을 고인 삼우제 끝나는 즉시 분배하자는 제안을 했으나 이견이 분분했다. 막내 여동생의 반대로 제안했던 모든 것은 무산되어 송사가 된 것이다. 5남매가 서로 자기 몫을 많이 챙기려는 욕심 때문에 법정에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나는 소장 내용을 요약하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같은 핏줄끼리 돈 몇 푼 더 챙기려는 욕심 때문에 소송까지 하다니 가슴이 아팠다.

나는 원고 피고를 어떤 방향으로 유도해서 사건 해결을 합리적으로 할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5남매간의 유산분쟁인데 이 문건을 보니 7남매 중 장남인 나로서는 동생들 얼굴들이 하나하나 스쳐가기 시작했다.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우리 형제 7남매의 일처럼 생각되어 5남매 사이에 원수 되는 일만은 막아야겠다는 다짐이 섰다. 판사의 판결까지 가는 불행만은 어떻게든 막아야겠다는 소신이 생겼다. 어떤 설득력 있는 화술과 호소력 있는 말을 동원해서라도 틀림없이 합의시켜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조정사건마다 조정위원은 2명인데 유경험자 여자 1분과, 금년 위촉받은 무경험자 남자조정위원 1사람이 조정을 하는 것으로 돼 있다. 나는 조정 경험이 없는 관계로 그냥 조정실로 가기가 좀 불안했다. 파트너로 배정된 여조정위원에게 집 출발 전에 전화를 걸었다.

"제가 금년 4월에 조정위원으로 위촉 받아 경험이 없는 데다 미숙한 점이 많은 사람이니 많이 도와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했더니 파트너 조정위원이 겸손한 말투로 응답하고 이따가 조정실서 만나자는 말을 했다.마침 파트너 조정위원이 변호사로 활동하시는 분이어서 든든한 생각까지 들었다.

조정 시간이 임박해서 원고 피고 소송대리인(변호사)이 조정실로 모두 모였다. 5남매 중 신병으로 입원한 2남인 피고만 빼고는 원·피고 4남매가 모두 출석했다. 내 오른쪽 바로 옆에는 원고소송대리인, 원고, 피고, 피고소송대리인 순으로 앉아 있다. 그리고 내 맞은편 자리엔 여조정위원이 앉아 있고, 바로 그 옆 오른쪽 상석 테이블에는 판사석이 배치돼 있었다.

조정 시간이 되었다. 원고 피고 이름을 불러 본인 여부를 확인한 뒤 출석상황을 점검했다. 이어 선임 여조정위원이 본 사건 쟁점 사항을 이야기했다.

다음에 내가 발언할 시간이 되었다. 내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제가 말씀 드리기 전에 선임 조정위원님, 말씀하실 것 있으시면 한 말씀 해 주셨으면 합니다."

" 저는 별다른 할 말이 없습니다. 말씀하시죠."

잠시 여유를 두고 있던 내가 입을 열었다.

" 소장 내용과 답변서를 보니, 원고 피고 소송대리인께서는 고민도, 마음고생도 많이 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원고 피고가 4남 1녀의 5남매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까?"라고 하니 원고 피고 모두가 " 예, 5남매 맞습니다."

" 5남매 송사 건을 보니 저도 여 동생 하나에 6형제인 7남매 중 장남으로서 남의 일 같이 보이질 않습니다. 같은 어머니 젖을 물고 자란 한 핏줄 동기간끼리 재판까지 하다니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세부적인 송사 내용을 말씀드리기 전에 일반적인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오늘 여기 조정실에서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사건 판결까지 간다면 진흙탕 속의 개싸움 같이, 동기간끼리 물고 뜯는 개싸움 이상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법정공방전까지 하게 되어 노출시키고 싶지 않은 개인 신상 치부까지 다 까발려져서 거기에서 오는 정신적인 타격과 상처는 말도 못하게 크게 됩니다. 여기 조정실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사안은 개인 의사가 존중되고 결정된 사항은 법의 보호를 받지만,그렇지 않고 판결까지 간다면 그 때는 개인 의지와는 상관없이 판결에 의해 모든 것이 강제 집행됩니다. 그렇게 되면 원고 피고가 본인 의지와는 상관없이 판결된 모든 내용을 수용해야 하기 때문에 그로 인한 정신적 물질적 피해는 말도 못하게 크게 됩니다. 또 판결까지 기다리자면 엄청나게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초조와 불안속의 정신적 고통의 연속입니다. 거기다 동기간끼리 재판까지 했다는 안 좋은 얘기가 항간에 퍼져 나가게 됩니다. 필경 그렇게 되면 그 동기간 '콩가루 집안'이라는 안 좋은 이야기가 구설수로 오르게 되어 고인이 되신 아버님까지 욕을 먹이고 사회생활을 하는 데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게 됩니다. 한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자란 형제자매가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보면서 원수로 사시는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합의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님의 마음도 편안하게 해드리고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줄이면서 동기간으로 사시겠습니까? 제가 생각할 때 조금씩만 양보를 한다면 합의사항이 도출되어 피차간 피해도 줄이면서 그 어느 누구도 넘보지 못할 천하무적 5남매로 살게 될 것 같습니다. 참고로 제가 드리는 자료 <정철의 훈민가>를 읽어보시고 현명한 판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말을 마친 후 다음과 같은 유인물을 한 장씩 나누어 주었다. 바로 이어 유인물을 천천히 읽어가며 호소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훈민가 - 형아, 아우야 (정철)

형아 아우야, 네 살을 만져보아라.(형아, 아우야, 네 살을 만져보아라. )

뉘손에 태어났관대 양재조차 가타산다.(누구한테서 태어났기에 모양조차 같으냐? )

한 젖 먹고 길러 나서 다른 맘을 먹디마라.(어머니 한 젖 먹고 자라나서 어찌 딴 생각을 할 수 있겠느냐?)



<정철의 훈민가>를 인용하여 얘기하는 중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같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란 동기간 한 핏줄 5남매가 물질에 눈이 어두워 재판까지 하다니…….

눈앞의 원고 피고가 내 형제들 같은 생각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앞을 가렸다. 순간 염기의 액체가 미끄럼틀을 탄 것처럼 미끄러져 내려왔다.

반은 목에 잠긴 저음의 소리로 한 마디 했다. 합의가 아니면 5남매가 평생 원수로 사는 길을 가는 것인데 현명한 판단을 해서 후회하지 않길 바란다고 했다.

잠시 후에 듣고 있던 3남인 피고가 울기 시작했다. 흐느껴 울며 자신이 요구했던 지분 금액을 포기하겠다고 했다. 내가 바로 3남 피고의 대견스런 모습을 놓칠세라 잽싸게 말을 이었다.

"사람이 살다보면 경우에 따라서는 참다운 용기를 발휘해야 할 때가 종종 있는데 여기 3남인 피고가 어려운 결단을 하셨습니다. 참다운 용기를 보여 주셨습니다. 정말 훌륭하십니다. 아주 장하십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곁에 있던 여동생 피고가 얼굴을 붉히고 있다가 또 흐느끼기 시작했다. 연이어 동시 다발적으로 원고 피고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여기저기서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원고 피고가 어찌 보면 좀 안 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감동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내가 한 말이 가슴에 와 닿았는지 원고 피고가 모두 울었으니 뒷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순간 긴장됐던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감성에 약한, 이 울보도 그냥 있기가 좀 안 되었던지 눈에서는 묻어나는 액체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흐르는 액체 속에서, 나는 소리 나지 않는 응원으로 좋아하고 있었다.

판사실로 인터폰 연락을 해서 판사가 조정실로 들어왔다. 판사는 우리 조정위원이 조정한 내용대로 아래의 사항을 합의 사항으로 기록해 가면서 확인하고 있었다.

「5남매가 조금씩 덜 챙기는 양보의 미덕으로 5남매 중 가장 살기 어려운 여동생에게 지분을 더 주기로 한다. 5남매 중 막내 1녀에게는 고인 유산 1억 6천 만 원 중에서, 6천 만 원을 상속 지분으로 하고, 4형제에게는 각각 그 나머지 1억 원의 1/4인 2천 500만 원씩을 상속 지분으로 한다. 이 모든 사안은 5남매의 만장일치 합의에 의한 것으로 번복할 수 없다.」

5남매 원고 피고가 조정실 들어올 때는 욕심과 원망의 눈빛으로 번뜩였는데, 나갈 때는 한 어머니 젖을 먹고 자란 5남매, 같은 핏줄이라는 생각만을 가슴에 새기고 나가는 것 같았다.

원수로 살 뻔한 이 5남매는 어머니 젖줄이 구세주가 되어 천하무적의 5남매로 살아 갈 것이다. 하늘에 계신 부모님도 원수로 살 뻔한 5남매를 기특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기뻐하실 것이다.



「형아, 아우야, 네 살을 만져 보아라.(형아, 아우야, 네 살을 만져 보아라)

뉘손에 태어났관대 양재조차 가타산다.(누구한테서 태어났기에 모양조차 같으냐?)

한 젖 먹고 길러 났으니 다른 맘을 먹디마라.(어머니 한 젖 먹고 자라나서 어찌 딴 생각을 할 수 있겠느냐?)



5남매들이여 < 형아, 아우야 > 시조를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 천하무적 5남매의 온기를 오래오래 풍겨주길 바란다.

5남매들이여 한 어머니 젖 먹고 자란 생각으로 하나 되어 천하무적으로 살아 주길 바란다.

남상선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남상선수필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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