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녀성 모습/사진=조영연 |
511번 국도상 초정과 미원의 경계인 분절고개 정상에서 북동쪽으로 사오백 미터 오르면 구녀성(구라성)이 나타난다.
정상을 중심으로 남북 날개로 내려가다 동쪽 계곡을 감싼 포곡식 산성으로 성의 둘레는 목측으로 대략 1,5km 정도 돼 보인다. 남벽에서 회절돼 북쪽성으로 연결되는 동쪽 계곡받는 배수로가 있고 그 동쪽 측면에 동문지도 남았다. 그 문지 북편으로는 견고히 쌓았던 성벽의 일부가 잔존한다. 삼태기 안처럼 아늑한 동문 안쪽에는 현재는 무속인들의 기도처로 됐지만 널찍한 공간이 있어 상당한 건물들이 존재했음 직하다. 그 공간 상부 정상 가까이에는 구녀성의 주인공인 9녀와 그 부모(무속인들은 성주라 함)들의 것이라는 무덤 11기가 나란히 있다. 뚜렷이 남은 성벽 자취 가운데 남벽 2곳과 북벽에 원형 그대로의 성벽이 남았다.
그것들을 통해서 본 성벽은 기초부부터 돌의 모서리들이 날카롭고 다듬지 않은 점판암석으로 비교적 허튼층쌓기를 함에 따라 잔 쐐기돌들을 많이 사용했다. 높이, 두께, 길이 등이 아주 불규칙하여 층도 일정치 않을 뿐만 아니라 많은 백제 지역 산성들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움보다는 날카롭고 예민한 느낌을 준다. 계족산성이나, 대전 성치산성, 호점산성 등과 성돌 모습이나 축조 방식이 비슷하여 안내판의 설명대로 같은 신라계 산성으로 보아도 무난할 듯하다. 잔존부를 통해서 볼 때 성벽은 외탁 편축을 하되 두께 3m 정도의 뒤채움석과 맞물려 견고하게 쌓았다. 성벽은 거의 수직에 가까울 정도로 쌓았다.
성의 시설은 동문 외에 북쪽 능선의 북문지, 남문지 등이 뚜렷하며 우물, 배수구 등의 흔적이 완연하다. 내부의 면적이나 건물지 가능성으로 미뤄 상당한 사람들이 주둔했을 듯하다.
성은 초기에는 백제가 사용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여러 정황이나 축성 방향 등으로 미뤄 신라가 주로 사용했을 것이며 진흥왕 무렵 영토 확장시 북쪽 고구려와의 관계가 주 임무였고 인근 낭비성에서 전개된 고구려와의 치열한 각축전과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삼년산성-낭성산성-상당산성-동림산성-당항성 혹은 남천정길보다는 낭성-구녀산성-낭비성-이성산성 등 중부 내륙의 통로를 관리하는데 그 쓰임이 있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삼국시대 이 성들은 횡적인 연계 하에서 상하와 좌우의 방어 활동이 용이한 점도 장점이 될 수 있다.
구녀성 표지석/사진=조영연 |
구녀성의 배경 설화는 삼년산성 등 여러 성들에서 보이는 남매간의 내기 경쟁 모티브에 기반을 두고 있다. 힘이 장사(壯士)인 남매(9녀 1남)들간의 갈등을 보다 못한 어머니가 아들은 한양에 보내고 아홉 딸들은 성쌓기 경쟁을 시켰다가 아들이 불리함을 보고 뜨거운 팥죽을 이용, 축성 시간을 지연시킴으로써 아들을 살리고 딸들을 죽게 한 비극적 이야기다. 다만 잘못을 뉘우친 아들은 개골산으로 들어가고 죽은 딸들의 무덤 곁에서 평생 아들을 기다리다 죽어 남편 옆에 묻혀 11기 무덤을 이뤘다는 결말이 이색적일 뿐이다.
구녀성 답사 후 초정에서 약수욕으로 땀을 식히고 인근 운보의 집에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재미는 덤이다.
조영연 / '시간따라 길따라 다시 밟는 산성과 백제 뒷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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