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산성 진동문 |
청주는 원래 백제의 상당현에 속했다가 삼국의 치열한 각축장으로, 상당산성은 백제성을 기초로 주인이 바뀔 때마다 변화되다가 조선 후기에 현재의 모습으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백제 상당현 당시에 성이 존재했다면 북벽의 흔적으로 미뤄 전체적으로 토축 중심으로 출발했을 것으로 보인다. 서원경의 방어성으로 유사시 활용을 위해 석축으로 바꾸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현재의 규모와 형태로 변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성 안에는 넓은 공간과 토지, 급수 및 집수시설, 군사시설은 물론 창고와 관아, 무기고, 거주시설 등을 갖춰 전란시 많은 군사와 백성들까지 들어와 장기간 수성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춰 유사시 성밖의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적과 싸웠을 것이다
고구려는 남진의 최전선으로, 신라는 서원경(西原京)을 삼아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방어와 공격을 위한 요새로, 백제는 중원으로의 진출과 신라 견제의 최 전초기지로 중요하게 활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때는 궁예와 견훤, 견훤과 왕건이 밀고 밀리면서 각축했던 곳일 만큼 이 성은 점령자들에 따라 변하는 역사마다 항상 소용돌이의 중심에 섰던 현장이다.
상당산성은 둘레 4km나 되는 규모가 큰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홍예문(虹霓門) 형태로 된 중심 출입로이자 남문인 공남문(拱南門), 동문인 진동문(鎭東門), 서문인 미호문(?虎門)을 세웠다. 서문을 제외한 각각의 문들은 옹성이 없이 치성(雉城)으로 보완했다. 남문을 들어서면 옹벽에 부딪쳐 성 밑으로 돌아나가도록 한 용도(甬道)의 일부가 남아 있으며 부분적으로 복원된 여장(女墻-성가퀴)의 일부도 남문 서쪽 부분에 있어서 적의 방어와 공격에 어떻게 대비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자연지형을 활용해서 축조했지만 남문 좌우는 초승달형으로 휘었으며 양 끝에 치성까지 두어 방어를 견고히 했다. 여장이 없는 곳에는 성둑 위에 돌맹이가 박혀 있어 여장의 흔적으로 여겨진다. 상당 부분 남아 있는 성벽은 자연석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고대 축성법을 잘 보여준다. 성 꼭대기에는 동장대와 서장대(제승당-制勝堂)터가 있으나 현재는 동장대인 보화정(輔和亭)만 복원됐다. 동문 북쪽, 동쪽 능선과 연결된 높은 곳과 남문의 서편에 두 군데의 작은 암문(暗門-비밀문)을 두어 유사시 비상구로 연락과 물자 조달에 사용했던 듯하다. 서문과 남문 사이 암문은 서남쪽 능선으로 연결되는 봉수대 것대산과 연결된다. 거기에는 진천 망이산-문의 소이산-계족산-환산-옥천 월이산 등을 거쳐 진주로 이어지는 간봉로가 있다. 성내 저수지는 농사나 유사시에 활용하고 해자 구실을 했을 것이다. 동벽에 수구가 설치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워낙 경사가 심한 북벽은 현재도 그 흔적을 볼 수 있는 바처럼 토성으로 대치됐을 것이다. 북벽의 석축들은 그리 높거나 견고하지 않은 모습이 후기 개축시나 최근에 구색을 맞추기 위해 쌓고 수구와 그 안의 집수정까지 만들었다. 현재의 성은 조선 중후기 숙종 무렵 개축한 것으로 주로 남쪽과 서쪽에 잘 다듬은 돌로 쌓은 성벽이 많이 남았고, 경사가 심하고 험한 계곡이 많은 북쪽은 성벽 높이가 아주 낮고 상당히 많이 붕괴된 상태다. 성돌의 배치도 종횡으로 맞물림과 들여쌓기로 크고 작은 재료를 잘 활용함으로써 실용성은 물론 미적으로도 매우 아름답다. 굵게 틈이 난 성돌 결합부에 자란 풀과 이끼, 담쟁이가 고풍스럽다. 무기고와 식량창고지도 있었다 한다.
상당산성 서벽 |
교통로 또한 평탄하고 편리해서 접근이 아주 용이하며 주변의 수목을 말끔히 제거하고 성벽 및 탐방길을 정비하여 시민들의 휴식처로서 알맞다. 성안에 각종 편의시설까지 곁들인 마을이 있어 치열했던 과거의 전쟁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평화로운 관광지다. 여러 면에서 작은 남한산성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맑은 호숫가 벚나무, 소나무 사이로 둥그스럼한 능선 아래 펼쳐지는 아늑한 성안 마을이 무척 정답다. 푸른 이끼 낀 가지런한 성돌, 가지 늘어진 장송, 묵직한 장대가 한결 고성의 운치를 돋운다. 品(품)자형 크고 작은 성돌의 배치는 현대 모자이크 작품에 지지 않는다. 푸른 소나무숲을 스쳐가는 안개가 멋지다. 안내상으로는 봄철 꽃 필 때의 풍경이 좋다고 했지만 특히 멀리 운주산성까지 펼쳐지는 미호천 위 석양 풍경은 사계절 절경이다. 이 아름다운 경치를 어찌 시인묵객들이 지나쳤으랴. 김시습이 남기고 간 해타(咳唾)가 공남문 앞에 비석으로 남았다. 전쟁과 죽음, 평화와 안식, 과거와 현재가 역설적으로 공존한다.
조영연 / '시간따라 길따라 다시 밟는 산성과 백제 뒷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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