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발췌 |
토가족 부락에 온 지 어느덧 2개월이 되었을 때였다. 그날은 2km거리에 있다는 치탄향(鄕) 정부에 들어가 볼 생각으로 아침식사가 끝나는 대로 집을 나섰다.
촌장이 같이 가 줄까 하고 물었지만, 혼자서도 괜찮다 싶어 카메라만 들고 길을 떠났다.(이곳에 오기 전, 추락사고가 날뻔했던 버스 안에서 카메라를 도둑맞고 나는 沿河縣. 옌허쌘에서 680元을 주고 아날로그 카메라를 다시 구입했었다.)
향(鄕) 정부는 아주 작은 건물이었다. 향장(鄕長)은 부재중이었고 부 향장이 반갑게 맞이한다. 그는 토가족이 아니었다. 다른 소수민족들에게서도 늘 보아왔지만 자치현(自治縣) 또는 자치향(自治鄕), 자치진(自治鎭) 정부라 해놓고도 막상 찾아가보면 장(長)급은 대부분이 한족이었다.
간혹 부(副)자가 붙은 사람들 중에 소수민족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작 소수민족은 과장급도 아닌 계장급 정도에 몇 명이 있을 뿐, 구조상 지방정부의 수장은 한족이 독차지하고 있었다. 이는 여러 가지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부향장은 성이 이(李)씨였다. 내 부인도 李씨라고 했더니 무척 좋아한다.
한 시간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내가 찾아온 목적을 밝혔다. 현재 토가족촌에 머물며 이것 저것 재밌는 풍습과 습관들을 취재했다.
그런데 더 역사적인 자료나 옛날 사진 같은 것이 보관돼 있으면 보고 싶어서 왔노라. 대충 이런 얘기를 했더니 그는 아주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전혀 자료가 될만한 것이 없노라고 했다.
그러면서 다음에 또 찾아 준다면 그때 준비해 놓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은근히 부아가 치솟았다. 중국인도 아닌 주제에, 게다가 그의 상급자도 아닌 주제에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나는 그냥 실수를 하고 말았다. 속상해도 스스로 삼켜버리고 말아야 할 것을 그 알량한 기자 근성이 남아 있어서 너무나도 큰 실언을 하고 말았다.
잠시 후에 얼마나 큰 화를 불러오게 될 줄 예상도 못한 채 말이다.
실언이란 다름 아니라, 이곳 토가족 만큼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소수민족이 드물다. 치탄부락은 관광자원으로 말하자면 중국에서도 으뜸가는 지역인데, 정부차원에서 자료 하나 보관하지 않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 이건 분명코 말하지만 담당자들의 직무유기나 다름없다. 이런 내용의 비판적인 발언이었다.
외국인으로서 망발을 해도 이만저만한 망발이 아닐 터. 듣고 있던 그는 심기가 불편했던지 얼굴색까지 변한다.
아차! 실수다 하고 느꼈을 땐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쏘아버린 화살.
미안하다. 쓸데없는 소릴 지껄여서. 내년에 다시 찾아오마. 그때 내가 한 잔 쏠 게. 얼렁뚱땅 얼버무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이란 것이 그렇다. 좋지 않은 얘기는 듣는 사람도 불쾌하지만, 좋지 않은 말을 한 사람 자신이 더 불쾌하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
뒤 꼭지가 간질간질한 느낌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정부건물 밖으로 나왔다. 부락을 향해 1km쯤이나 왔다고 생각될 즈음, 부르릉부르릉 요란한 소리를 내며 오토바이 한 대가 달려와 멎는다.
한 청년이 내 앞에 와서 휙 오토바이 방향을 돌리더니 위에 타라고 한다.
누군지 모르지만 고맙다. 그러나 그냥 걸어가도 된다고 하자, 그게 아니라 부향장이 나를 다시 데리고 오라고 하니 어서 타라는 것이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소중히 보관했던 자료가 뒤늦게 생각이라도 났단 말인가. 아무 생각 없이 오토바이 위에 오르자 쏜살같이 달려 잠깐 사이에 鄕정부에 도착했다.
다시 나를 맞이한 李 부향장은 친절한 웃음을 날리며 녹차를 따라준다. 헤어질 때의 불퉁하던 모습과는 너무 대조적이라 오히려 당혹스러울 지경이다. 바짝 의자를 당겨 앉으며 그가 물어온다. "당신 이곳에 오면서 등기(登記)를 했느냐?"(앗차! 덫에 걸렸구나. 그동안 다른 곳을 다니면서 늘 市정부, 縣정부, 아니면 鄕, 鎭정부에 사전연락이 되어 있어서 그들의 안내를 받곤 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등기가 되었었지만 이곳에 올 때는 전혀 그런 과정을 생략하고 혼자 맨 땅에 헤딩하기로 작정하고 왔던 것이 곧 문제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貴州省 정부가 이미 나의 활동을 알고 있으니 별 문제 있으랴.)
"너무 급히 오다 보니 잊었다. 그렇찮아도 돌아가는 길에 縣정부에 들려 늦은 대로 등기를 하려고 맘먹고 있었다"라며 그를 쳐다보니 어느 사이 근엄한 공직자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렇다면 기다려라. 내가 당신의 등기를 도와줄 생각이다. 아직 중국법을 모르는 모양인데, 외국인은 어느 지방을 방문해도 자유지만 반드시 도착과 함께 등기를 해야 한다.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엄청난 불이익을 받게 된다. 잘못하면 강제출국도 당하는 수가 있다. 잠시 기다려라."하면서 수화기를 든다.
상대방과 통화를 하는데 지방 사투리에다가 얼마나 또 빠른 속도의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다만 얘기 도중 떵지(登記)란 말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아 상급기관에 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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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를 마친 그는 당당한 모습을 보이며 잠시만 기다리라면서 현(縣)공안국에서 직접 등기를 도와주러 올 것이다. 차 한 잔 더 줄까? 하면서 능글거리기까지 한다.
걸려도 된통 걸렸구나 싶었지만 다른 묘책이 떠오르질 않는다. 그는 왔다 갔다 하며 슬쩍슬쩍 내 눈치를 본다. 내가 여권을 숙소에 두고 왔기 때문에 가서 갖고 오겠다고 하자, 그것도 기다리고 있으면 알아서 다 해 줄 것이다. 그리고 중국공안은 외국인에게 친절하다. 그러니 아무 염려 말고 기다려라. 이제는 나를 안심시켜 가며 팔짱을 낀 채 느긋이 내려다 본다. 기분이 보통 나쁜 게 아니다. 아까 그의 면전에서 자료가 비치돼있지 않다는 문제를 놓고 언짢은 소리를 했대서 지금 바로 보복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 공인국의 백차가 도착을 했고 세 명의 사복경찰이 들어선다.
제법 살기등등하다. 방문턱을 넘어서면서부터 나를 쏘아보는 눈들에 파란 불꽃이 인다.
"당신 어디서 왔습니까?"
그 중 나이가 가장 많이 들어 보이는 친구가 마주 앉아서 험상궂게 얼굴을 찡그린다.
#중국 공안의 임의 동행, 취조
한국에서 온 작가라고 대답하자 여권을 보여달라고 한다. 숙소에 있다고하자 누구 집에서 머무르고 있느냐고 되묻는다.
"촌장 집에 유숙 중이오."
"이곳엔 언제 왔습니까?"
"두 달 쯤 됐을 거요."
"무엇하러 왔습니까?"
"소수민족 투자(土家)족의 아름다운 풍습과 전통을 취재해서 한국에 소개하려고 왔소."
"이곳에 오기 전에 추천서 같은 걸 받은 곳이 있습니까? 그리고 작가라고 했는데 작가 증명서는 있습니까?"
"추천서는 없지만 꾸이저우성(州) 정부에서는 다 알고 있으니 문의해 보시오. 그리고 세계 어느 나라도 작가증명서 같은 것은 없오."
"성(省)정부는 성(省)정부이고 여기는 옌허(沿河)이오. 정부 공안국으로 같이 가 줘야겠습니다."
"나를 연행하겠단 말입니까? 무슨 이유입니까?"
"당신은 이곳에 오면서 등기를 하지 않았소. 외국인은 반드시 등기를 해야한다는 걸 모른단 말입니까?"
"그런 문제라면 미안하오. 늘 하고 다녔는데…. 이번에 여기 올 때는 너무 늦게 도착해서 하지 못했고 떠나면서 들리려던 참이었소."
"같이 가서 늦게라도 등기를 도와줄 터이니 우리 직원과 숙소로 가서 소지품을 모두 들고 나오시오."
이들의 태도는 단호했다. 뒤에서 팔짱을 낀 채 李 부 향장은 능글맞게 웃고 서 있다.(이거 잘못 걸렸구나. 그러나 좋다. 이것도 경험일 터이니, 갈데까지 가 보자.)
아랫배에 힘을 단단히 주고 나서 그들의 백차에 올라탔다. 젊은 공안원 두 명이 내 양 옆에 앉은 채 촌장집으로 달렸다. 갑자기 백차가 나타나자 마을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몰려들기 시작, 삽시간에 수 십 명이 촌장집 마당이며 대문가에서 웅성거린다. 대충 짐을 정리하고 나서 당황해하는 촌장 부부께 인사를 했다.
"뭔가 나에 대해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별 일 없을 겁니다. 걱정마십시오. 다음에 꼭 다시 찾아오리다"라고 하며 그 동안의 숙박비가 든 봉투를 쥐어 주었다. 촌장 부인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그들 역시 너무 갑작스럽게 닥친 일인지라 무슨 말이든 할 수가 없는 처지로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다.
대문을 벗어나자 주민들이 두 명의 공안원 앞을 가로막고 소리를 지른다. 이 분은 참 좋은 사람이다. 무슨 일로 잡아 가느냐. 이유를 대라. 대충 이런 내용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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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락민들의 숫자에 기가 꺾였는지 공안원들도 별 일 아니라며 길을 비키라고 타이른다.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내가 나섰다.
"여러분들! 그동안 참 고마웠습니다. 모두들 건강하십시오. 공안당국에서 저에 대해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큰 일 아닐 터이니 염려 말고 돌아가십시오. 다음에 꼭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들의 얼굴을 두루 살피려니 콧날이 시큰거린다. 겨우겨우 그들을 벗어나 백차에 올랐다. 향정부에 들려 기다리던 공안을 더 태우고 공안국으로 향했다. 정보과인지 수사과인지 모를 방 안에 앉혀놓고 이들은 우루루 나가 버린다.
시계를 보니 이미 점심 시간이 지나 있었다. 나를 홀로 남겨둔 채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오는 모양으로 거의 한 시간 이상이 지나서야 다시 들어온다. 만성 당뇨병 환자인 나로서는 식사 때가 지나자 허기가 지면서 혈당수치가 급상승하는 느낌이다. 입술도 혓바닥도 바싹바싹 마르고 입안이 쓰기만 하다. 그렇다고 뚜벅뚜벅 걸어나갈 수도 없는 일. 그들이 다시 돌아와서야 물을 마시고 싶다고 하니까 차잎이 둥둥 떠있는 뜨거운 녹차 한 잔을 갖다 준다.
그 중 한 명이 나를 책상 앞으로 의자를 끌고 와 앉으라고 한다. 본격적인 조사를 할 모양이다. 먼저 백지 한 장과 볼펜을 주면서 자기가 부르는 대로 쓰라고 한다.
준비가 되었느냐고 재차 묻더니 이름은? 고향은? 한국의 현재 주소는? 언제 중국에 왔으며, 그 동안 어디 어디를 다녔는지? 왜 중국에 왔으며 중국에서 무엇을 보고 싶은 것인지? 직업이 작가라고 했는데 무슨 내용의 글을 썼느냐? 이곳엔 언제 왔으며, 도착 이후 만난 사람은 누구누구며, 무엇을 보기 위해 왔느냐? 외국인은 움직일 때마다 반드시 등기를 해야 하는데 왜 하지 않았느냐? 이곳을 떠나면 어디로 갈 생각이며 한국은 언제 돌아가느냐? 등 등을 구체적으로 적으라는 주문이었다.
그의 요구대로 다 적어서 내밀었더니 한참 살피다가 한국인이 어떻게 이 정도로 한자를 잘 쓰느냐고 신기한 듯이 묻는다. 본론에 벗어난 질문까지 대답하고 싶지 않아 침묵을 지켰다. 컴퓨터를 키는 눈치다. 그리고 무언가를 열심히 본다.
한참 후 날더러 자기 곁에 와서 컴퓨터를 보라는 시늉을 한다. 나 역시 무언가 하고 호기심에 그의 옆에 다가갔다. 사람들 이름과 생년월일이 계속 물 흐르듯 자막으로 뜨고 있었다. 화면이 정지하면서 내 이름과 비슷한 이름들이 줄줄이 뜬다. 그러나 똑 같은 이름은 없다. 언뜻 보기에 인터폴을 통해 공조 중인 한국인 범죄자 명단 같았다. 다시 제 자리에 돌아가 앉으라고 하면서 이번엔 내 얼굴을 유심히 살핀다.
이럭저럭 한 시간쯤을 소비했다. 그는 슬그머니 일어나더니 휑하니 나가버린다. 잠시 후 두 번째 사나이가 앞자리에 와 앉더니 이번엔 질문만 하고, 내가 답변을 하면 그대로 받아 적는 눈치다. 그런데 그 질문이란 것이 처음 작성하라면서 물었던 내용과 똑같다.
작업이 끝나면 나가고 또 다른 공안이 들어와 똑같은 걸 묻고 적기를 반복했다. 행여나 같은 질문에 대한 틀린 대답을 집어내기 위한 속셈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다섯 명이 돌아가면서 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나서 그 중 나이도 많고 책임자로 생각되는 자가 폼을 잡고 마주 앉더니 정색을 하고 엄포를 놓기 시작한다.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오는 것은 사업차 왔든, 관광차 왔든, 아니면 학업차 왔든 환영한다. 중국에 와서도 자유다. 그러나 중국은 법치국가이기 때문에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중국의 법을 준수해 줘야 한다. 그런데 당신은 가장 중요한 외국인 등기에 관한 법률 제 몇 조, 몇 항을 위반했다. 외국인이 이 곳에 와서 등기를 하는 것은 우리들이 안전하게 보호해 주기 위해서다.
법대로라면 당신은 30만 위안 이하의 벌금에 처하거나 3개월 이하의 징역, 그리고 강제 추방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부터 당신을 보호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보호란 곧 구속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그 동안 참았던 화가 치밀었다. 어디까지 가는가 보자! 하고 배 고픈 것도 참고 (저희들끼리만 식사를 챙기고 오는 고약한 친구들임을 이미 알고 나서다.) 입안에 쓴 물이 고여오는 것도 인내하고 응해주었는데 이제 와서 뭐 벌금? 구속? 강제추방? 기가 막히는 소리들 하고 있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소리를 질러댔다. 뭣이라고? 좋다. 맘대로 해라. 나는 너희들이 이미 조사했듯이 외국인이다. 너희 나라 법이 있으면 우리나라에도 법이 있다. 구속을 해도 좋고 뭣을 해도 좋은데 먼저 변호사를 불러달라. 그리고 북경에 있는 한국 기자들에게 연락을 해야겠다. 그리고 꾸이저우(?州)성 문화국과 뚜이와이 빤꿍스(?外?公室)에도 이 사실을 빨리 알려야겠다. 한참을 떠들었더니 입이 더욱 마른다. 반쯤 남은 녹차를 벌컥 들이켰다.
핸드폰을 꺼내 들고 전화를 거는 시늉을 하자 그가 벌떡 일어나 손을 내저으며 조금만 참고 앉아보라고 한다. 무슨 할 얘기가 또 있느냐. 할테면 해봐라. 거듭 언성을 높이니까 내 옆자리로 오면서 두 팔을 흔들며 앉아서 얘기하잔다. 얼핏 벽시계를 보니 오후 5시가 지나고 있었다. 배가 고파서 쓰러질 지경이다.
#극적인 훈방조치
이마에서는 진땀이 흐른다. 입술을 깨물며 털썩 주저 앉았다. 서슬이 퍼렇게 나오던 그가 담배를 권한다. 필요없다. 빨리 결론을 내자. (후에 생각한 일이지만 이 대목은 정말 적반하장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남의 나라에 와서 법을 어기고도 큰 소릴 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들의 태도가 누그러졌다. 과장인 듯 싶은 사람이 "결코 화를 낼 일은 아니다. 우리들 법대로 하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그러나 우리가 얘길 들어보니 당신이 그 곳 투자주(土家族)마을에 가서 주민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병든 사람들을 치료도 해 줬다고 들었다. 특별하게 이상한 행동을 했다는 보고도 없다. 그리고 나이도 연만하니 이쯤에서 경고로 그칠 생각이다. 그러나 명심해야 한다. 다음엔 어느 지방을 가든지 꼭 관할파출소에 가서 먼저 등기하는 일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오늘 장시간 동안 수고 많았다. 그래서 우리들이 저녁을 사겠다. 잠시라도 화가 났었다면 풀기 바란다."
그리고는 여권을 돌려준다. 나 역시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다. 수고는 당신들이 했다. 거듭 밝히지만 등기를 안 한 것은 내 실수다. 미안하다. 그런 의미에서 저녁은 내가 산다. 같이 나가자"하고 밖으로 나오니 공안국 마당에 30여 명의 부락민들이 몰려와 있다가 박수를 치며 좋아라 들 한다.
아하! 그랬었구나. 그 먼 길을 이 사람들이 이곳까지 달려와 농성을 벌인 탓에 내가 훈방이 되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이 미치자 가슴 속으로부터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른다.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그들 곁에 다가가 일일이 손을 잡아 주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는 다섯 명의 공안들 역시 밝은 표정이다.
문 밖에는 이들이 타고 온 몇 대의 경운기가 서 있다. 무리들 속에 있던 촌장이 내 배낭을 빼앗다시피 하며 마을로 다시 돌아가자고 한다. 그러나 부락으로 다시 돌아가기엔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마지막 모양새가 안 좋았을 뿐이지만 다시 만날 날을 아쉬워하는 그들을 보내는데 30분 이상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벌여야만 했다.
<다음주에 계속>
김인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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