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3월 1일과 6월 25일, 8월 15일 등 특정 기념일에만 이들에 대한 조명이 이뤄져 지역민들이 이들이 조국을 위해 어떤 활동을 펼쳤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현실에서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28일 대전보훈청에 따르면 2월 현재 충청권에 생존하는 애국지사는 대전 1명, 충남 1명, 충북 1명 등 3명뿐이다. 대전은 정완진(92·유성구) 옹이, 충남에는 이일남(94·금산) 옹, 충북은 오상근(95·진천) 옹이 거주하고 있다.
우선 정완진 옹은 대구상업학교 재학 중 1943년 4월경 항일학생결사 태극단(太極團)에 가입해 맹활약했다. 태극단은 구체적 투쟁방안에 대해 협의하고 조직을 정비해 최고의결기관으로써 간부회의도 구성했다. 또 군사학연구와 군사관계서적의 번역, 글라이더와 폭발물 제조에 대한 연구도 추진했다. 1943년 5월 배신자의 밀고로 태극단은 일본에 발각됐다. 정완진 옹도 이때 수업 도중 다른 단원들과 함께 수없는 고문을 받았다.
이일남 옹도 1942년 전주사범학교 재학 중 일본인 교장의 노골적인 민족차별교육에 분개해 비밀결사 단체인 '우리회'를 조직하고, 민족정신을 고취해 항일활동을 펼쳤다. 이후 자금 조달 목적으로 1945년 1월 충남 금산사방관리소 인부로 취업하고 있다 발각됐다. 그해 8월 17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됐다가 광복으로 출옥했다.
오상근 옹은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 소속으로, 중경(重慶)에 있는 토교대(土橋隊)에 배속돼 임시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의 안전에 대해 경호를 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은 애국심 하나로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학생운동과 광복군으로 맹활약을 펼쳤다.
대한민국을 위해 젊음을 바친 대가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르거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갖은 고문을 당했다. 독립운동을 펼쳤을 때 이후에 받게 될 아픔을 생각하지 않고 일본에 억압받았던 대한민국을 바로 잡고자 헌신한 애국지사들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관심은 3·1절과 6·25 한국전쟁일, 광복절 등에만 집중적돼 평소엔 관심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한 애국지사 가족은 "봉사단체에서 봉사도 와주고, 위문품 등 많은 도움을 주시는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면서도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조국을 위해 힘써온 만큼,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평소에 애국지사들이 어떤 일을 했고, 어떤 고충을 겪으면서 살아왔는지 정도는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방원기 기자 b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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