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인터넷 발췌 |
이튿날은 바로 이 부락에서 5일장이 서는 날이었다. 소수민족들을 취재하면서 가장 즐거운 시간 중에 하나가 5일장을 보는 일이다. 5일장을 보기 위해서 짧게는 30분에서 길게는 3시간 이상을 나갔다가 돌아와야 했었는데, 내가 묵고 있는 마을에서 5일장이 선다니까 발품 팔 일이 없어서 좋았다. 평소에는 마을 중앙이 텅 빈 채 커다란 광장이던 곳이 이른 새벽부터 각 처에서 모여드는 장사꾼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임시 천막을 치고 진열대를 늘어놓으며 온갖 상품들이 보기 좋게 올려지고 있다. 집집마다 여인들은 마치 이 날을 기다리기나 했다는 듯이 전통복장으로 치장을 한다. 소수민족 어딜 가나 화려한 여성들의 복장이 이색적이었지만 이곳 토가족 여성들이 가장 정성을 들이는 부분은 머리인 것 같다. 은색 바탕에 역시 은빛 액세서리를 주렁주렁 매단 모자가 특이하다. 두건처럼 둘둘 천연색 천으로 머리를 감아올린 후 그 위에 모자를 쓰는데 머리 위에는 작은 빗과 브로치들이 꽂혀 있고 놀라운 것은 기다란 이쑤시개가 장식용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꽂을 게 없어 왠 이쑤시개냐? 생각하며 가까이 가서 살펴 보니 틀림없는 이쑤시개였고 점심시간 후 어떤 여인은 머리 위에 장식용으로 꽂았던 이쑤시개를 뽑아 직접 사용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한참이나 이를 쑤신 후 다시 꽂혀있던 장소에 정확하게 원위치하는 이쑤시개. 절로 웃음이 나온다.
외부 사람들은 생필품이나 잡화를 갖고 왔고 본 지방 사람들은 주로 식당문을 열거나 참기름 등과 같은 조미료와 닭, 오리, 돼지새끼, 육류 따위를 시장에 내놓는 것 같았다.
외지 사람들 가운데는 묘족, 이족, 쫭족 등 소수민족들이 많았다. 재밌는 것은 서로가 보통화(普通話)를 쓰지 않고 자기들만의 고유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는데도 상거래는 전혀 어려움없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하나, 둘 숫자 역시도 틀린 발음이고 문자(文字)지만 이 숫자만큼은 서로가 상대방의 언어를 알아 듣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으면 손가락을 접는 모양에 따라 의사 소통을 하는 것이었는데, 참으로 신기한 모습들이었다.
전통복장을 한 처녀들은 시장 골목 골목을 떼지어 몰려다니며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랄랄랄랄.
시장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오려는데 누군가가 소매를 잡아끈다. 촌장이었다. 재미있는 곳이 있다며 가 보잔다. 시장 한 쪽 으슥한 곳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둘러서서 소리들을 지르고 있다. 즉석 닭싸움 현장이었다. 어린 시절 고향 읍내 장터에서 보았던 닭싸움이 기억난다. 판을 주도하고 있는 사람은 큰소리로 이 닭은 어느 부락 누구가 임자고, 저 닭은 어느 부락 누구가 임자이며 주 특기가 무엇 무엇이라고 소개를 한 다음 돈을 걸라고 한다. 구경꾼들은 이 쪽 저 쪽을 주시하다가 맘에 드는 쪽에 돈을 건다. 누군가 받아 적는 이도 없는데 돈은 한 사람의 주머니로 쏠려 들어가고 휘파람 소리와 함께 닭싸움이 시작된다.
상대방의 목덜미를 노리는 張서방네 닭과 李서방의 닭은 상대방의 꽁무니를 맴돌며 노리고 있으니 쉽게 결판이 나질 않는다. 닭 주인들이 나서서 다시 판을 시작케 한다. 결국 승자는 목을 노리던 놈이었고 패자는 뚝뚝 떨어지는 피를 보자 금새 날개를 접고 사람들 틈으로 도망칠 기세다. 승자와 패자가 갈라지면서 승자 쪽에 돈을 걸었던 사람들은 두 배의 보너스를 받는다.
법으로 중지돼 있다는 닭 싸움이나 개싸움은 이렇게 소수민족들의 5일장에 끊이지 않고 벌어지고 있다. 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5일장이 열리는 동안 내내 이 얘기들로 세월을 보내며 5일장을 기다린다.
말싸움이나 소싸움도 있는데 이 경우는 명절에 주로 이루어지고, 판도 크다. 5일장은 언제 어디서나 그러하듯 오후가 되면서부터 주막집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이 부락 저 부락에서 장보러 왔던 사람들이 갖고 온 물건을 다 팔고 나서 필요한 상품들을 구매한 후 들리는 곳이 주막집이다. 서로가 서로의 살아가는 얘기, 세상 돌아가는 정보를 교환하는 장터의 풍경은 예전의 우리나라나 현재의 중국이나 차이가 있을 리 없다. 처녀 총각들 역시 이날만은 자유롭게 몰려다니며 그룹 데이트도 하고 선물을 주고 받으며 단 둘만의 데이트를 즐기는 시간과 장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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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이 깃들면서 떠들썩하던 시장이 썰물 빠지듯 상인들이 돌아가고 나면 국수 집이며 콰이찬(중국의 대중음식으로 밥 위에 반찬을 얹어 파는 간단식이다.), 주막집 등은 뒷정리를 하며 하루의 수입을 계산하는 즐거움이 따른다. 비교적 평온한 가운데 오늘의 5일장은 잘 지나갔지만 한가지 사건도 있었다. 이 부락 청년이 시장에서 팔려고 일주일 동안 잡아서 모아두었던 뱀 보따리가 터지면서 수 십 마리의 뱀들이 벌벌 시장판에 기어 다니는 통에 때아닌 소동이 벌어진 것이다.
그날 밤 촌장의 얘기로는 그 청년에게 부락이름으로 벌이 내려질 것이라고 했다. 뱀도 이곳의 특산물인데 누군가 잡아서 팔기 시작하면 너도 나도 뱀잡이에 나설 것임으로 부락민들 전체 회의에서 엄금했던 일이라고 한다. 물론 그 청년은 목돈이 필요해서 그랬을 터이지만 결코 그냥 묵과하고 넘어 갈 수는 없다며 촌장의 의지는 단호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튿날 당사자인 청년이 슬그머니 부락을 떠나버림으로써 없었던 일처럼 되어 버렸다.
하루는 이곳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는 촌로 한 분이 나를 초청해 주었다. 성이 朱씨라고 밝힌 이 노인을 만나기 위해 촌장과 동행을 했다.
이곳 출신들 가운데는 지방정부 고위 관리는 물론 중앙정부 관료를 지낸 분들도 있으며 어떤 사람은 부친이 일본에 유학까지 다녀왔고, 미국 캐나다 등지에 이민간 선조들도 꽤나 있다고 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상당한 토지가 국유화 되었고, 집은 몰락했지만 아직도 소 궁궐 같은 저택 안에서 옛날의 위엄을 지키고 있는 朱옹의 모습이다.
아들 딸 며느리 모두가 대도시로 떠나있고, 젊은 먼 친척내외가 자기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면서 머잖아 죽으면 이 모든 재산을 친척에게 넘겨줄 것이라고 했다.
이 얘기를 듣던 촌장은 해마다 춘절(구정)에는 아들 딸이 며칠씩 다녀간다고 귀띔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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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난 지 며칠 후엔 깊이 간직했었던 젊은 시절 사진을 보여준다. 중공군 복장의 흐릿한 흑백 사진 한 장을 보는 순간 호기심이 더욱 발동했다.
귀주(貴州) 부대라는 이름으로 수 만 명이 참전을 했다가 겨우 살아 돌아온 사람은 1천여 명 뿐이었다며 낯빛을 흐리는 朱옹은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다른 나라의 일이긴 해도 남북분단의 안타까움을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했다.
만난 지 10일째가 되는 날은 지팡이에 의지해 나를 가까운 동산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홍군 제4지대 본부기지로서의 이 부락 정황과 일본군과의 게릴라전에 대해 기억을 되살려 주기도 했다. 문화혁명 시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사한 하룡장군을 지척거리에서 모셨다며 눈시울을 붉힌다. 지략이 뛰어나면서도 용맹스러웠다는 하룡장군. 내가 그분이 쓰던 방에 기거를 하고 있다고 하자 그것 참 묘한 인연이라면서 하장군의 무용담을 줄줄이 꿴다.
<다음주에 계속>
김인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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