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만실에서 나온 산부인과(강재화 산부인과) 의사선생님이 첫 마디로 던지는 말이었다. 대기실에서 분만실 쪽에 고정되다시피한 눈과 얼굴에 화색이 돌게 하는 한 마디였다.
"뭐라고요? 딸이라고요 ? "
"예, 공주님입니다."
"산모는 좀 어떤가요? "
"예, 순산으로 산모도 건강하십니다."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잠시 후에 산실로 안내받아 아내와 갓 태어난 아기를 상면하게 되었다.
" 당신 너무 수고했어요, 정말 장하고 큰 일 잘 해냈어요" 하며 아내의 손을 꼬옥 잡아 주었다. 진통에 시달린 아내의 창백한 얼굴에 보일까 말까 한 미소가 새어 배어나왔다. 어렴풋한 그것은 단말마 같은 진통에서 벗어나 아내가 살아 있음을 알게 해주는 유일한 증표였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이만이 보여줄 수 있는 희열의 표징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고통과 초조와 불안에서 벗어나게 하는 세상에서 제일 가는 신이 내린 선물과 같은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세상에서 둘도 없는 평화 경 그 자체가 시작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아긴 어때요?"하는 아내의 목소리에 뉘어 있는 아기를 쳐다보니 생동감으로 충만해 있어야 할 아기가 가냘프고 불규칙한 숨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거기다 1시간이 흐르는 동안에 아기다운 울음소리를 들어보질 못했다.
아기 얼굴을 수시로 쳐다보았다. 가슴에 불안 기류가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제대로 말도 못하고 속으로 삭이는 아비의 속은 시간이 흐를수록 숯검정이 되다시피 타 들어가고 있었다.
2시간 정도 지났을 때 원장 선생님이 면담을 요청했다. 집무실로 들어갔다. 긴장된 가슴은 두근거리는 조바심으로 짓눌리고 있었다. 불청객으로 터를 잡은 초조가 좁쌀만큼도 자리를 내어 줄줄 몰랐다. 찰나에 의사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아기의 숨이 고르지 못하고 호흡 상태가 좋지 않아 인큐베이터 처방을 해야 하는데 저희 병원에는 그 시설이 없으니 다른 큰 병원에 빨리 데리고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조금은 감을 잡은 일이었지만 청천벽력과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아기가 위험하니 빨리 인큐베이터 시설 있는 병원으로 서둘러 가라는 것이었다.
발길을 서둘렀다. 애써 냉정을 찾으려 했으나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머리를 쥐어짜다시피 숙고한 끝에 담임반(79년 대전여고) 학생 중에 소아과 병원으로 있는 학부형을 떠올렸다.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우리 아기에게 어떤 위험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먹구름에 휩싸였다. 그 순간 체면이고 염치는 안중에서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역시 사람은 다급하면 물불 가릴 줄 모르는 용기가 나온다는 말이 내 것이 되었다.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려는 본능이 나에게 작동하고 있었다. 평상시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남한테 아쉬운 이야기하는 것은 엄두도 못내는 못난이에게 용기와 뻔뻔한 숫기가 생겼다. 그 당시 소아과병원(방소아과)으로 많이 알려진 학부형이 운영하는 병원을 허겁지겁 찾아갔다. 다급한 상황이어서 머뭇거림 없이 사정 얘기를 했다. 얘기를 다 들은 원장님(학부형)이 걱정하지 말고 아기를 빨리 데리고 오라 했다. 자비와 사랑이 묻어날 듯한 그 한 마디는 그야말로 구세주의 음성으로 들렸다.
아기를 데리고 병원에 빛의 속도로 찾아갔다. 아기는 인큐베이터 속에서 사흘 정도 되니 정상을 되찾았다. 퇴원해도 좋을 정도 호전됐다. 일주일만 더 있다가 안심할 수 있을 때 퇴원하라고 했다. 눈물이 나올 정도 고마웠다. 전례 없는 학부형 신세를 톡톡히 지은 것이다. 아니, 평생 고마움을 안고 살아야 할 딸애 생명의 은인을 하늘에서 주신 것이다.
덕분에 딸아이는 잘 자라 주었다. 거기다 예쁘기까지 하고 머리가 총명하여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달고 자랐다. 도마동 살 때 집으로 전화가 오면 딸아이가 전화를 도맡아 받다시피 했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예, 감사합니다. 도마동 남보라(딸 이름)인데요. 누구를 찾으시나요?"하며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잘 받는다고 오나가나 칭송이 자자했다. 어떤 친구는 우리 집으로 전화를 했다가 교환한테 잘못 걸은 전화로 알고 전화를 끊은 적도 있다 한다. 딴 집에서는 볼 수 없는 우리 집 다섯 살박이 교환 전화매너에 당황하였기 때문이다.
위기에서 살아난 그런 귀염둥이가 최종 학교 대학과정까지 다 마치고 시집갈 나이가 되었다. 그 사이에 아비는 이 학교 저 학교 다니다보니 지방에 있는 서산여고를 거쳐 대전 시내 몇 개 고등학교에 이력을 남겼다.
방소아과(방두현 원장님) 덕분에 살아난 딸아이가 벌써 서른이 넘었다. 역시 사람은 자기 생활이 바쁘다 보면 잊지 말아야 할 소중한 것을 잊고 사는 것 같다. 그 동안에 잊을 수 없는 딸애 생명의 은인을 잊어버리고 살 뻔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따금씩 아내가 지난 세월을 상기시키는 얘기를 양념삼아 해 주어 고마운 마음을 싸가지고 다녔다.
어느 날 딸애를 보며 아내가 수십 년 전 방소아과 원장님 이야기를 반추하듯 또 꺼냈다.
"우리 보라 시집가기 전에 생명의 은인 그 고마운 분을 한 번 꼭 찾아뵈어야 할 텐데"하며 보은이 발효된 얘기를 토해 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은 늘 빚을 지고 사는 사람처럼 마음 한 구석은 묵직한 얼룩이었는데 바늘로 찔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옛날 대전천(大田川) 홍명상가 아래에 있었던 방소아과 자리를 찾아갔다. 숱한 세월 속에서 그 자리는 다른 건물이 몸단장을 새로이 하고 있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실감케 했다. 대가로 오는 몫은 허탈감이 대신했다. 그 후 10년 동안 마음의 숙제를 하고 얼룩진 마음을 풀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봤다.
그 당시(1978년) 몸빼바지에 베레모를 썼던 대전여고 우리 반 반장이 지명(知命)의 나이가 된 방소아과 딸(미경이) 연락처를 알려 주었다. 대전여교 30 주년 행사 때 쓴 동창회 방명록을 보고서였다. 심봉사가 인당수 제물이 된 딸 심청이 목소릴 듣는 기분이었다. 고민했던 연락처 전화번호 찾기 실타래는 다 풀리게 되었다. 벌써 대학생 아들의 엄마가 된 원장님의 따님(77년 담임한 학생)과 통화를 했다. 오매불망(寤寐不忘)하던 귀인의 거주지와 연락처를 알아냈다. 대덕구 도룡동에 사신다는 것이었다.
딸애(보라)를 데리고 31년 전의 딸애 생명의 은인 방문길을 떠났다. 대덕구 도룡동으로 가는 길은 까치소리만큼이나 기대감과 설렘으로 부풀었다. 운전하는 차 트렁크 속에는 바라바리 싼 검정콩 1말. 마늘 한 접. 참깨 1되가 숨 쉬고 있다. 시골 처가에서 우리 먹으라고 주신 참깨 1되에다가 시골 숙모님께서 주신 검정콩 1말 마늘 한 접이 트렁크 속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거기다 딸애가 신통하게도 저의 엄마 피를 받아서인지 편물점 실을 사다가 틈틈이 뜨개질바늘로 손수 뜬 장갑 한 켤레가 검정콩부대 옆 팩 속에 정겨운 자리를 하고 있다. 그 엄마의 그 딸이라 해도 무색하지 않을 것 같았다. 딸애의 얘기인 즉은 생명의 은인인 소중하고 귀한 분 찾아뵙는데 작지만 자신의 정성과 마음을 드리고 싶어 장갑 한 켤레를 떴다고 했다. 털실 사다 시간 있을 때 틈틈이 뜬 장갑이다.
알알이의 검정콩과 마늘 그리고 깨알 속에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우리 부부의 마음이 담겨져 있고, 털실 장갑 실 한 올 한 올에는 우주 공간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리 딸애 보라의 마음이 숨 쉬고 있다. 철에 맞지 않는 털실장갑이지만 그 속에는 마냥 느꺼워하는 딸애 보라의 보은하는 마음이 똬릴 틀고 있다.
음수사원(飮水思源)이란 단어가 생각났다. 무심코 마시는 한 방울의 물이라도 그 근원을 생각해 보고 마시라는 얘기다. 교편생활에서 가르쳤던 이론을 실행하는 것 같아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31년 전 딸애의 생명의 은인에게 검정콩 한 말과 털실 장갑 한 켤레로 보은을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인지 조금은 부끄러웠다.
허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오로지 마음에 느낄 수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시적인 것이 아닌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랑이란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다.
음수사원(飮水思源)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게 해준 방소아과 원장님의 느꺼운 사랑과 배려에 감사를 드린다. 보은으로서는 부족하지만 검정콩 한 말과 장갑 한 켤레로 31년 동안 얼룩졌던 마음을 달래본다. 검정콩 한 말과 장갑 한 켤레, 우리 보라의 영원한 보물이었으면 한다.
남상선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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