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북리 토성 내부 모습. |
현재는 사방의 성벽을 복원하고 파란 잔디로 잘 조성한 평지에 동서남북 十자로 길을 포장해 놓아 가지런한 성의 모습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둘레 689m로 전체적인 형태는 정방형 토축성이다. 사방 성벽 중간 절단부에 각 방향의 문지가 있는데 남북 문지는 한 편이 약간 옆으로 휜 채 돌출돼 뻗어 옹문 형태를 취했다. 평지성인 성내의 물은 남문쪽을 동벽을 돌아 북벽을 거쳐 한 바퀴 돌아 서북쪽 수문으ㄹ 통해 미호천으로 빠져 나가게 만들어 자연스레 해자를 형성한다. 성벽폭은 기초부가 대략 10여m이나 4 모서리는 옹벽 형식으로 폭이 20m 이상 두껍다. 이 부분은 넓이로 미뤄 망대 내지 성루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제방이 없던 미호천 건너편을 충분히 한눈에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지 폭은 대략 개구부는 사오m 정도였다가 안으로는 약간 좁혀들어가는 형태인데 처음에는 땅을 파고 기둥을 세웠다가 뒤에는 냇가의 돌로 다진 후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동문지 발굴 기록을 보면 석축 기단이 없이 1.4 내지 1.7m 간격으로 8개의 기둥을 세우고 성벽 중앙부(체성-중간)는 황갈색 흙을 넣어 판축(기둥과 판자 등을 대고 쌓음)했으며 외피는 모래 섞인 흙과 황갈색 흙을 교대로 쌓아 습기 조절에 유리하도록 했다. 후일 평양성이나 사비나성 축조에서도 발견된다. 곡성부는 안팎으로 점토층을 대어 반원형(곡성 형식)으로 축조했는데 이런 축성법은 몽촌이나 풍남토성 등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에 의하면 청동기 시대와 철기시대 층들이 있지만 곡성부 표면에 원삼국시대 토기편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축조시기를 그 이전으로 올리기 어렵고 서문지 바닥에서 발굴된 목탄의 방사선 측정 결과 서기 40~220년 사이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이런 점들로 추측해 보면 이 성은 대체적으로 몽촌토성 등의 삼국초기 백제토성들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규모가 크지 않고 위치가 상당산성 북쪽에서 진천 방면 북으로의 진출로상, 미호천과 무심천의 합류지점 수로변 평지에 자리잡고서 이 부근 교통로 경계나 곡창지대에서 주변성의 치소성 역할이 주요 임무였을 것으로 보인다. 후백제 견훤이 상당산성을 빼앗은 다음 상당산성 서문 밖 까치내(鵲江) 곁에 토성을 세우고 세금을 거둬 상당산성으로 운반했다는 '상당산성고금사적기'를 보면 고려 이전까지 사용됐다가 통일로 인해 반도 내 성으로서 방어 임무가 사라진 후로는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혹 활용이 계속됐다면 치수 관리나 읍성들의 치소용으로 활용됐을 가능성도 크다.
주변에는 동쪽 상당산성을 위시해서 서쪽 부모산성, 동북쪽 증평 근처 이성산성, 북쪽 대모 혹은 두타산성 등이 있어 수로와 육로로 이들과의 연계 활동도 추정해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성 역사에서 옹성 형식과 방형성의 시원이라는 점과 초기 토축성의 모습이나 축성법을 보여 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정북리의 명칭은 과거 토성의 동남쪽에 있었던 마을 안샘의 북쪽에 있다 해서 붙여졌으며 남쪽 인근 들 건너 신봉동에는 백제 고분군들이 분포하고 있다는 점도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주변의 넓은 들판과 미호천의 탁 트인 풍경에 가슴이 시원하다.
조영연 / '시간따라 길따라 다시 밟는 산성과 백제 뒷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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