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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인터넷 캡쳐 |
이곳에 온 다음날 아침이다. 새벽잠이 없는 나는 이른 아침 6시부터 일어나 마을 한 바퀴를 돌고 강변까지 나섰다가 배가 출출해서 돌아와 보니 8시가 넘었는데도 한 밤중이다. 집집마다 늦잠이 습관화 되어있는 탓으로 9시가 지나서야 아낙네들이 아침 준비를 시작한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광경이 연출되기 시작했다. 마당 한 쪽에 식탁이 차려지고 곧 아침 식사를 하려는 참인데 옆집 사나이가 한 손에 밥그릇을 들고 연신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으면서 찾아오는 것이었다.
옆에 끼어 앉아 자기집 식탁이나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잠시 후에는 이런 사람들이 거의 10명으로 불어났다.
처음에는 낯선 외국인이 왔다니까 호기심으로 찾아왔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왔던 사람들이 돌아가면 다른 사람들이 또 오고 이 집 주인도 어느새 자리를 떴는지 보이지가 않는다.
반찬이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집집마다 순례를 도는 모습들을 보면서 뷔페식당이 이들의 습관을 본 따서 생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 시간 이상 몇 집을 돌고 나서야 식사를 마친 그들은 그래도 마지막에는 처음 자기 집에서 들고 나온 밥그릇과 젓가락은 꼭 챙겨서 돌아가는 것으로 식사시간을 마무리한다.
비밀이 있을 턱이 없는 이웃간의 정. 식사시간이야말로 이들에겐 더 없이 귀중한 이웃사랑 나누기 실천장이 되는 셈이다.
#강변의 낭만
뒤로는 산이 둘러서 있고 옆으로는 강이 흐르고 있어 土家族들은 江山의(자연의) 변화에 순응할 줄 안다. 뿐만 아니라 산을 조화롭게 가꾸며 강을 유효 적절하게 활용할 줄도 안다.
오래 전 옛날 湖南 지방에서 이주해 와서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는 이 곳 沿河? 치탄 부락. 비교적 돈이 많은 부자들의 마을이었음을 실감케 하는데 지금은 산에 약초 재배를 하고 산 너머 농경지에 농사를 지으며 강에서 무진장 민물고기를 얻기도 한다.
산에는 뱀이 많기로 유명해서 남자들은 심심하면 산에 올라 십여 마리씩 뱀을 잡아다가 술안주를 만든다. 강에 투망을 던져 펄펄 뛰는 고기들을 나눠먹는 인심 좋은 사람들이다. 그렇잖아도 식사 때가 되면 이 집 저 집 순례하는 습관이 있는데다가 누구네 집에서 별식이라도 장만했다 하면 우르르 몰려가서 음식을 나누며 친목을 도모한다.
해가 질 무렵부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수건과 비누를 들고 강가로 나온다. 더운 날씨를 강물로 식히려는 심산이다. 한 낮에는 햇볕이 너무 뜨거워 꼬마들이나 놀러 나오지만 저녁에는 일찌감치 식사를 마치고 강물놀이가 큰 재밋거리가 된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위쪽에서부터 여자들이 한 군(郡)을 이루고, 그 밑 쪽으로 남자들이 첨벙첨벙 물에 뛰어든다. 청춘 남녀들은 그보다 훨씬 아래쪽에 자리를 잡고 한데 어울려 물싸움도 하며 마냥 즐겁기만 하다. 그러다가 해가 서산을 넘어가고 칠흑 같은 어두움이 몰려오면서 어른들은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고 강에는 청춘 남녀들의 세상이 된다. 평소에 대놓고 말을 걸지 못하던 관계였어도 상대방이 잘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중에는 용기가 나는 법인가 보다. 부락에 도착 후 며칠이 지났을 무렵이다.
상해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왔다는 앞 집 청년이 낮부터 은근히 청을 넣어왔다. 오늘 저녁에 강가에서 청년들의 특별한 모임이 있는데 참석하지 않겠느냐는 얘기였다. 젊은이들이 노는데, 나 같은 늙은이가 끼어도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당신을 늙은이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남녀가 어울리는데 나이가 무슨 관계냐'며 정색을 한다. 허기야 우리나라와 틀려서 연령으로 친구 관계가 형성되는 중국이 아님은 익히 알고 있었다.
20대나 30대 청년도 쉽게 하오펑여우(좋은 친구)라며 내 어깨를 두드릴 때는 당혹감이 앞서기도 했었다.
중국에 와서 1년이 지난 후에야 사회적으로도 권위의식이 없는 나라, 서로 좋으면 나이 관계없이 친구가 되는 나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 가장 행복한 부자관계로 인식되는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처음에 느꼈던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 예의범절을 엿가락과 맞바꿔 먹은 후레자식 같은 놈들이라는 생각을 삭혀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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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인터넷 캡쳐 |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데 낮부터 유혹해오던 청년이(뒤에 알고 보니 25세라고 했다. 내 막내 딸보다 어린 나이다) 촌장 집으로 찾아왔다.
촌장이 먼저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한다. 젓가락을 들어 보이며 같이 하자고 하니까 자기는 이미 마쳤다고 하면서 한국 손님이 식사를 마치면 같이 갈 곳이 있어서 데리러 왔다고 한다.
촌장은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다가 이내 표정을 바꾸며 "너희들 오늘밤 좋은 술판이라도 벌이는 게냐?"고 묻는다. "그게 아니라……."하면서 머뭇거리자 "손님이 피곤하신데 늦게까지 술 먹이면 안 된다."며 선배답게 부탁을 잊지 않는다.
식사를 마치고 청년을 따라 나섰다. 예상했던 대로 강변으로 내려갔는데 마을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하류 쪽이다. 제법 큰 바위들이 있고 그 가운데는 평상처럼 넓직한 바위들도 보인다. 이미 10여 명의 남녀가 모여있고 계속 그 숫자가 불어나더니 30여 명이나 되었다. 대략 가늠해 볼 때 여자가 남자보다 숫적으로 더 많다. 자연스럽게 원을 그리며 둘러앉아 한 처녀가 일어나 사회를 본다. 남자보다 여자가 기가 센 부족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대충 얘기를 정리해 보면 '자기들 친구 가운데 아무개가 며칠 후에 도회지로 떠나게 되었다. (혹은 시집을 간다는 얘기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늘 친구들이 모여 송별회를 열어주기로 했다. 그런데 특별히 이 자리에 외국사람이 참석해 주어서 무척 기쁘다.'라는 내용이었다.
그녀의 얘기가 끝나자 모두들 나를 바라보며 박수를 친다. 어디선가 환잉꽝린(환영합니다)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나를 데리고 온 청년이 날더러 일어나서 한마디 하라고 재촉이다. 중국말이 서툰 내가 망설이자 아예 앞에 서서 두 손으로 내 손을 맞잡고 일으켜 세운다. 박수소리가 요란하다. 그러나 한마디도 할 수가 없다. 그렇찮아도 짧은 중국어 실력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앞선다. 그러다가 튀어나온 것이 나도 모르게 <아리랑>이다.
내 딴에는 구성지게 한 자락 뽑았다고 생각하고 자리에 앉았다. 뜨거운 박수가 오히려 부끄럽다. 술 대신 음료수를 돌리고 수박을 나누며 게임도 한다. 어린 시절에 재미있게 놀던 수건돌리기와 똑같은 방법으로 진행되는데 남자들은 여자들을, 여자들은 남자들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 게 그 저의가 느껴진다. 그리고 꾸무럭대다가 술래가 된 사람은 어김없이 일어나서 노래 한 곡씩이다.
웃고 떠드는 사이에 캄캄한 밤중이 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짓궂은 남자들에 의해 여자들이 차례대로 끌려가 강물에 던져진다. 여자들은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다가 갑자기 역공세를 펴며 남자들에게 달려든다. 그 화가 나에게 미쳤다. 서너 명이 나를 붙들고 강 쪽으로 밀고 갔다.
강변까지 밀려 가서 있는 힘을 다해 버텼으나 결국 풍덩! 물 속에 팽개쳐져 버렸다. 옷 입은 채로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내 꼴을 보며 재미있다고 박수를 쳐대는 그녀들의 웃음소리가 강물마저 출렁이게 한다. 도망치듯 강변으로 나오자 누군가가 불쑥 수건을 내민다. 어둠 속에서도 얼핏 보아하니 평소에도 유난히 말을 걸고 싶어하던 이웃집 처녀였다.
바위 뒤로 돌아가 거리를 둔 채 아래 위 옷을 벗어 물을 짜냈다. 캄캄한 밤중이라고 해도 벗고 있을 수는 없는 일.
그냥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다시 껴입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젖은 옷을 다시 입기가 쉽지 않아 끙끙 대고 있는 참인데 옆 쪽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린다. 얼핏 돌아보려는 순간 번개처럼 달려드는 여자가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팔로 내 목덜미를 껴안고 불 같은 키스!
엉거주춤한 채 입술을 빼앗겼는가 싶었는데 이 여인은 다시 잽싸게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어두운 밤이기도 했지만 도대체 누구인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
얼굴도 모습도 모르겠고 다만 남자가 아니라는 것밖에 종잡을 수 없는 날벼락 같은 키스였다. 그 자리에 더 있기가 민망스러웠다.
꼭 누군가가 이 광경을 훔쳐본 것 같은 두려움도 없잖아 있었다. 어둠 속을 더듬어 가며 촌장 집으로 돌아왔다. 마당에는 칸델라 등불이 흔들리고 있었고 5~6명의 남자들이 잔을 돌리며 왁자지껄 즐거운 술추렴들을 하고 있다가 내가 들어서자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오느냐며 의아스러워 한다.
모르는 척 그들을 지나쳐 방으로 돌아왔다. 한참이나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은 채 옷 갈아입을 생각도 잊고 멍청히 앉아 있었다.
누굴까? 어둠 속에 밀착해온 여인이었는지라 얼굴도 기억이 없다. 결코 작지 않은 키, 느낌으로만 풍만한 가슴의 소유자, 그리고 그녀가 몰아 쉬던 뜨거운 숨길만 잔영처럼 맴돌 뿐이다. 이미 와족촌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1백 여명이 주시하는 가운데 장난기가 다분히 섞인 키스 공습이었기에 웃음판이 된 적이 있었다.
<다음주에 계속>
김인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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