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벌 모습/사진=조영연 |
이들 지역은 미호천변의 비옥한 농토에 대륙성 기후로 예로부터 살기 좋은 고장으로 알려졌다. 그런 까닭으로 이 일대에는 일찍부터 사람들이 터전을 잡고 살아왔었다. 특히 진천 등 북부지역은 4C경의 야철유적지가 발견될 정도로 철생산 지역이어서 농경생활의 촉진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역사적으로 청주, 진천 지역은 삼한시대에는 천안, 청주 사이로 추정하는 마한의 중심국인 목지국이나 마한(馬韓)의 한 소국이 있었다가 백제가 먼저 차지하면서 대체적으로 청원 지역은 일찍이 백제 영토였다. 그러다가 중원지역까지 진출하던 백제가 서진을 꾀하던 신라와 괴산과 중원지역을 중심으로 충돌하는 한편 장수왕 때의 남진으로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게 빼앗긴 백제는 연기, 청주 근방까지 밀려난다. 청주 부근까지 내려와 6세기 전반까지 머물던 고구려는 신라와 세력다툼에 들어가고 백제는 청주 서쪽 연기 일대에서 신라와 고구려 두 세력과 맞섰다.
고구려와 백제가 다투는 틈을 타 신라는 괴산, 단양, 충주 방면을 이용해 한강 상류로의 확장을 시도하는 한편 진평왕 51(629)년에는 낭비성(娘臂城-청주 동북방)에서 김유신의 신라군이 고구려군을 대파함에 따라 진천지역까지 진출했다. 북에서 압박을 가하는 고구려에 맞서 일시적으로 신라와 백제는 결혼동맹 등을 맺으면서 상호 협력하에 공동전선을 펴 북으로 전진한다.
백제는 무령왕 무렵 한강 유역 고토를 일부 회복하여 한강 하류 지역으로 나아갔다. 한편 백제 성왕 때는 그렇게 어렵사리 회복한 한강 하류 부근의 영토를 신라에게 불법적으로 탈취당한 뒤 그 보복으로 신라 영토를 공격하고자 했지만 관산성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왕마저 전사함으로써 꿈은 무산되고 그 후 백제는 쇠퇴의 길을 걷는다.
이 과정에서 청주 지역은 신라에 확고히 복속되고 신라는 빼앗은 한강 유역에 新州(廣州)를 세웠다. 통일 후 신문왕5(685)년에 청주에 웅천주 소속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다가 경덕왕 때는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시키고 후삼국시대 청주 지역은 태봉(泰封)과 후백제군의 군사상 요충지로 양국간 치열한 각축장이 되었다.
청주 상당산성 진동문/사진=조영연 |
교통상으로 오늘날도 경부, 중부고속도로가 남북으로, 조치원, 충주 방면 36번 국도가 동서로, 용인-진천-대전 방면 17번 국도, 청주-상주간 25번 국도가 남북으로 통과한다. 이 외에 이들 사이로 동남쪽으로는 경상도로 통하는 괴산-문경 방면의 새재길, 화령, 문의 방면 등의 샛길이 있다. 진천에서는 안성 죽산-용인-한양방면으로 가는 교통로(현 17번 국도)와 천안∼평택∼당항성 방면으로 통하는 45번길이 분기된다. 이 교통로는 죽주산성과 만노산성-사산성 등을 축조했을 정도로 삼국시대에도 중시됐었다. 이들 남북 도로와 동서길 주변에 산성과 봉수들이 많다.
청주 인근으로 조선 시대 京畿左道와 연결되는 율봉도(栗峰道)가 지났다. 또한 봉수로는 경상도 동래 방면에서 올라오는 두 직봉로 사이의 간봉로가 이 부근을 지난다.
이곳에는 상당산성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조치원 방면에 부모, 병마, 동림산성, 동쪽에 낭비성과 구녀성이 있다. 북쪽 진천 방면 17번 국도 변에 정북리 토성, 목령성, 대모산성이 있다. 남쪽 25번 국도변으로는 낭성, 주성, 함림산성 등을 거쳐 삼년산성에 연결된다. 그 사이 진천 근처로는 대모∼만노∼사산성을 거쳐 서쪽 당항성이나 북쪽 안성 죽주산성 등으로 연결된다. 구라(구녀)산성이 문경 방면으로, 부강 방면 507번 지방도에 다수가 금강 수로변에 분포돼 있다.
조영연 / '시간따라 길따라 다시 밟는 산성과 백제 뒷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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