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그 멈출 수 없는 변주18-1,209cmⅹ150cm,한지에 혼합재료, 2018 |
55년이란 세월은 기산에게 작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단단히 할 수 있던 시간이었다. 작품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 속에서도 인간 정명희를 잃지 않으며 미술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새 옷이나 새 신발을 사면 빨리 나가고 싶은 것처럼 작품이 완성되면 빨리 보여주고 싶다는 기산. 나이는 그의 작품에 끼어들지 못한다.
기산이 첫 전시로부터 55주년을 맞아 또 한 번의 전시를 연다. 그동안 80여회의 개인전이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될 작가인생의 한 부분이다. '금강, 그 멈출 수 없는 변주'전에서는 지금까지 이어졌던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낸다.
전시에 앞서 기산의 작가관과 최근 작품세계를 들여다봤다. 세상을 바라보는 원로 작가의 미술사는 한 사람의 삶 그 자체였다.
▲작가노트: 정체성 고민…"무위자연에 순응하게 돼"
긴 시간 작가로 인생을 살아온 기산은 어느 순간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방황한다. 첫 전시를 함께한 죽림회 친구들과 미술잡지를 나눠보던 시간이 새삼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기산은 인간의 수명을 100세로 놓고 봤을 때 이 기간 자신의 정체성을 소중하게 키우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고 말한다. "예술가에게 정체성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며 일정 시점이 지나면 외적인 영향에 의한 자신의 정체성 강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산은 현대를 '패치워크 문명시대'라고 정의한다. 패치워크는 여러 가지 색상과 무늬 소재의 작은 천 조각을 서로 꿰매 붙이는 것으로, 작가는 무엇이든 서로를 필요로 한다면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게 됐다고 본다. 이러한 생각은 기산의 작품에 여실히 드러난다. 한지와 수묵을 이용한 동양적 요소와 기하학적인 색채와 구도 등은 장르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기산의 고민은 이 지점서 다시 시작된다. 긴 시간을 방황해 다시 원점에 서 있는 세상을 보며 윤회의 경계를 깨버리고도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의 허황된 욕망을 발견한다.
기산은 최근 강물을 가지고 있는 '빛과 소리'에 대해 명상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곳에 치유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연과 사물이 인간과 소통하듯 무위자연에 순응하게 된다. 좋은 작품을 제작한다는 것은 작가 스스로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작품이 생명을 지속시키는 비결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금강과 물, 사각과 원
기산은 어린 시절 금강 변에 터를 잡고 적지 않은 시간을 대전에서 작업했다. 그에게 있어 금강은 휴식이자 안식처였지만, 벗어날 수 없는 굴레와도 같았다. 하지만 다음 작업에 대한 고민이 생기고 길이 보이지 않을 때, 금강의 우직함은 기산을 버티게 했다.
기산은 얼마 전 인도여행에서 본 갠지스 강을 말하며 강이 가진 힘을 '정화와 치유'에서 찾았다. 인도인들은 그 강의 신적인 힘을 믿으며 몸과 마음을 씻고 죽은 자를 떠내려 보낸다. 이러한 강의 힘을 기산은 더 일반화해 물의 힘으로 여기고 예전부터 작품으로 표현해 왔다. 작게는 한 잔의 물을 표현하기도 하고, 크게는 금강으로 나타낸다. 그에게 있어 강은 작업의 원천인 동시에 큰 힘이 되는 존재다. 그리고 그러한 강을 보이는 풍경 그대로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아야 할 모습으로 추상화한다.
기산의 이러한 사상이 최신작에선 기하학적 형태로 두드러진다. 2016년 원형과 부채꼴을 테마로 했던 금강홍(錦江虹) 시리즈와는 또 다른 변주다. 사각의 사각 화면 안에도 마치 조각보처럼 크고 작은 사각의 색종이를 오려 붙여 화면을 잇기도 한다. 기산에게 조각 하나하나는 중생(衆生)의 마음을 상징한다. 중생이 이 조각보가 바로 인생이며, 우주이고 결국 신의 세계가 된다고 작가는 생각한다.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과 삶의 조각이 모여 이루는 광활한 우주의 원리를 신의 세계로 이해하는 것이다.
▲화중유시 '멈출 수 없는 변주'
화중유시(畵中有詩). 기산의 그림 속에 시적 정취가 있다. 작가의 기운이 작품에 반영되고 이것은 곧 작품의 격이 된다는 뜻이다.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린 서양미술과 달리 동양에선 작품에 작가의 정신을 담아낸다. 기산은 최근 작품 한 쪽에 '보기 좋은 삶이, 행복한 삶일까?', '멈출 수 없는 변주'(Unbroken Variation)를 반복적으로 적고 있다. 단순히 그림이 주는 하나의 느낌에 의미를 입히며 보는 이들에게도 사색의 시간을 제공하게 한다. 전시는 22일부터 28일까지 대전갤러리와 이공갤러리에서 만날 수 있다. 임효인 기자
금강, 그 멈출 수 없는 변주17-23, 47.5cmⅹ47.5cm, 한지에 혼합재료, 2017 |
기산 정명희 화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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